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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Dec 28. 2019

1999년의 심은하는 너무 예뻤다.

2019년에 다시 본 '청춘의 덫' 감상기

곱창끈 맨 심은하가 그리 이쁘다고들 말하던 그 드라마.

선녀같다는 표현 그대로, 맑고 깨끗하게 이쁘던 심은하가 나왔던 그 드라마.


‘청춘의 덫’


유튜브의 sbs 채널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2회분을 올려주어 그것을 챙겨보는 재미로 근 한 달을 보냈다. 저 드라마가 전파를 타던 시기 나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그렇다 할 친구도 없었고, 어떻게 무엇부터 공부하는지도 몰랐으며, 갑자기 온갖 숙제들을 피피티와 워드프로세서로 만들어오라는 달라진 수업환경에 징징거리던 나로 인해, 없는 살림 털어 마련해주신 컴퓨터로 PC통신에 눈뜨던 시기.


1999년이었다.


PC통신 채팅에 눈떠 늦은 시간까지 나에게는 그저 미지의 세계였던 서울의 또래들과 대화하는 재미에 10만 원을 넘나드는 전화요금 통지서가 날아들 즈음이면 부모님 눈치를 봐야 했던 그때.

내 기억 속, 그 시절은 온통 흐린 추운 날이었다.

봄, 여름, 가을이 없는 그냥 흐린 초겨울의 연속이었다.


그 후로 20년이 지나 다시 본 청춘의 덫.

심은하는 박제된 젊음 마냥 푸른 옥처럼 청아하게 아름답고, 이종원은 욕은 나와도 처연한 불쌍하며, 전광렬은 멋있기만 해야 하는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재가 있었고, '이건 아니야'를 아는 순간 떠날 줄 아는 유호정은 멋지고 당당했다.


7년간 한 남자를 만나며, 혼인신고도 없이 사실혼 관계로 그 남자의 가난한 시골집 생활비까지 일부 보조하며 헌신한 여자 (심은하). 하지만, 남자 (이종원)는 그 답답하고 고만고만한 삶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매끈한 외모와 자신만만한 태도의 자신을 보고 첫눈에 반한 사주의 딸 (유호정)과의 결혼으로 인생역전하기 위해, 7년의 여자와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내어버리고 거친 걸음을 간다. 그 거친 걸음에 밟혀, 말조차 나오지 않을 충격과 상처 받은 여자는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요절한 부모 대신 키워준 이모에게 한없이 등짝을 맞으며 멍청하고 한심하다는 야단만 맞고, 그 사이 황망하게도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채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인생은 반전의 미학이 있는 법. 7년의 여자는 남자의 회사의 사주 조카이자 미래 회장이며, 남자가 그토록 잡으려는 성공의 깃발 같던 새 여자의 오빠 (전광렬)이기도 한 새로운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결혼을 승낙하며, 여자와 남자. 그리고 그 여자와 남자의 인생 2막에 서있는 새로운 남과 여는 말 그대로 덫 같은 청춘에 휘감긴다.


욕망으로 미안함은 접어둔 채 내달리는 남자, 그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쓰러지다 새 인생으로 제대로 된 복수를 하는 착한 여자.


뻔할 스토리, 그려지는 전개일 수 있는 이 드라마에 심장을 붙이고 혈관을 이어, 펄떡이는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작가 김수현의 필력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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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덥석덥석 주워 먹지 마라. 넉넉해져라.

난 무서울 게 없어. 옷 벗고 춤출 수도 있어. 당신 부셔버릴 거야.

할 수 있다면 당신의 신발이라도 되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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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장면들과 대사들.

좋은 쌀을 오래오래 입안에 넣고 꼭꼭 씹어 배어나는 은근한 단맛처럼, 20년이 지나 보니 버릴 게 없는 드라마였다. 젊은 연인들의 치정이 아니라 여러 가족을 감싸고 있는 묵직한 온도가 있는 드라마였다.


내가 조금 더 어렸다면, 아마도 자색 고구마칩과 맥주 한 캔을 우적우적 먹으며 이종원을 욕하며 봤을 드라마. 하지만 지금의 이종원은 욕은 나와도 불쌍한 인간이었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묵은 곰팡이내 같은 식구들, 모두가 내 눈치를 보는 가난함. 이 가난을 감내하는 여친인지 엄마인지, 아내인지 모를 묵묵한 오랜 여자. 답답했을 수 있다. 그 답답한 속에서 어느 날 눈떠보니 깜깜하던 놀이동산에 전기가 갑자기 들어온 듯 휘황찬란함이 손짓을 하고, 뭐부터 타고 뭐부터 사 먹어야 할지 모르게 눈이 돌아가는 시간들이 펼쳐진다.


놀이동산 저 너머에는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생활의 때가 하나의 색이 되어버린 누비 잠바를 입은 맑은 눈의 여자가 손을 내밀고 있고.


그랬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저곳은, 저 시간은 내 인생에 돌아가기 싫은 구질구질함 그 자체. 인생의 시간들을 배어낼 수 있다면 딱 잘라 내던지고 밟고, 불태워 가루로 만들어 떠나보내고 싶은 시간과 기억.


그래서 이종원은 천하의 몹쓸 인간 소리를 무시하며, 철저히 욕망만 보고 걸어갔을 것이다. 7년 여자의 식구들이 면전에 소금을 뿌려도, 한복 곱게 차려 입고 찾아온 여자의 할머니의 붙잡음도 무시하며. 무엇이 중요한지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으로, 마음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던 사람처럼.


나 역시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볼 때, 필름 잘라내듯 뚝뚝 잘라 태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다. 밥사먹을 돈도 없어 자판기 커피로 때우던 때, 배신한 상대와 헤어져야 함을 알면서도 혼자 남을 그 자체가 두려워 주저하던 시간들, 연인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해보려 노력하다 날아가버린 나의 청춘들.

하지만, 난 그 시간이 지금의 소소한 안정감. 행복으로 인도해줬다 믿으며 오늘까지 걸었건만, 안타깝게도 나를 지나간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나를 그저 도망치고 싶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가난의 기점으로 여겼다.


사랑받고 대우받고 싶다는 드라마 속 심은하의 대사처럼, 긴 시간 사랑받고 대우받고 싶어 상대를 만나고 진심을 주며,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매번 끝나는 관계는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다 야밤에 길가에 몰래 갖다 버린 냉장고가 되어버린 ‘나’로 끝났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애정도 없다는 얘기라는 청춘의 덫 드라마에 남겨진 댓글처럼, 찬찬히 돌이켜보니 난 이제 지나간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있었다. 밉지 않고, 화나지 않고, 붙잡고 싶지도 않다. 그때 나의 청춘을 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오늘의 내 가난하지 않은 생활이 있기까지 기여해준 한 삽의 흙 정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쌍하다. 한때는 사랑을 말했던 사람을, 잘못 찍어 빛 들어간 망한 장면의 필름으로 만든 그 사람의 얕은 깊이가 불쌍하다. 하기사,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전까지 환한 불빛을 내며 쉭쉭 소리 내 작동하던 냉장고의 코드를 거칠게 뽑아버리고, 밤길에 몰래 갖다 버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알량한 몇 푼의 벌금도 아까워 스리슬쩍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행위.


버려진 냉장고로 취급하던 사람들이 구겨버렸던 나의 자존감은 또 새로운 사람, 환경, 그리고 시간에 비례해 쌓인 경제력이 세워주고 있었다. 먹고 싶은 것 사 먹을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선물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지갑이 있어, 점점 색이 바래지는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청춘에 생기 있는 볼터치를 해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극 중 심은하는, 지나간 구질했던 기억들, 그리고 길가에 내버려진 냉장고처럼 버려진 배신의 시간까지 낱낱이 밝힘에도 내가 사랑하니 괜찮고, 당신을 위해 이용당하고 호구가 되어주겠다는 전광렬과의 결혼으로 새 삶을 시작하고, 제대로 사랑받고 대우받는 삶을 살아내어 간다.


나이를 들어갈수록 이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나이 먹어도 아프고 슬픈고 흔들리는 것은 매한가지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말하고 영원을 약속받고 싶어 하는 것은, 대우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끝나지 않을 기대. 일상의 빡빡함에 온몸이 쥐어짜 내진 하루의 마감에 다독여주는 그 한마디가 주는 달달함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 얼마나 가벼운 언사였던가 할지 모를 사랑의 언어들.

내가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될 나이가 정말 된다면, 그 유혹의 의미는 그것이리라.

돌아오지 않을 달콤한 향기가 공기로 날아가도, ‘죽네, 사네’ 하며 인생이 흔들릴 유혹 역시 지나가리라고 덤덤해질 수 있는 것.


1999년의 심은하는 거침없이 내치던 무례한 사랑을 제 힘으로 밀어내고, 고고한 옥처럼 빛나는 삶으로 나아갔고 2019년의 나는 그땐 그랬지를 읊조리며, 그래도 오늘이 있고 오늘의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말할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밤길에 묵묵히 영문 모른 채 서있던 냉장고에 어느 순간 발이 나오고, 팔이 나와 척척척 그 밤길을 걸어 나왔다고. 오늘은 스스로를 쓰다듬해주며 맥주 한 캔 해야지.

그리고 한번 더 ‘청춘의 덫’을 정주행 해야겠다.


1999년의 심은하는 맥주가 절로 들어가게끔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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