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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Feb 10. 2024

가사도우미 일당 38400원 + α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최근 퇴사는 갑작스럽고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불시에 누군가에게 뺨을 맞아 얼얼한데 정신 차려보니 하행선 1호선 어드매를 헤매고 있어 일단 바로 다음 정차역에서 내려 두리번 대듯 퇴사했다.


최근 퇴사한 직장에서는 천만 원 연봉 삭감과 더불어 직급 강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마주하기 전부터 폐기대상 1순위에 나를 올려둔 신임 대표 앞에서 하는 자기소개는 알맹이 없는 말 떠벌리기에 지나지 않는 것.


입사 후 무언가 해보려 할 때 나를 이 자리로 데려온 전 대표의 갑작스러운 해고로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래도 새 대표가 오면 뭔가 해볼 것이 있겠지 하고 기다리던 나의 기대는 그저 태만으로만 보인다는 것을 잊었었다.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전 대표의 여러 업적들로 인해 경영상태가 상당히 악화된 상태라는 사전 설명이 없었어도, 밖에서 차 한잔 같이 한적 없던 전임 대표지만, 어쨋든 나를 채용한 사람은 전 대표였으니 나는 그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청산대상 1호인 것은 사실 당연한 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나 자원의 부재에 이미 답답했고 무리하지 않는 삶을 추구해서 낮은 연봉, 저강도 노동의 일자리를 선택한 것이었는데 이 나이를 퍼먹고도 또 잊었다. 회사란 그 어떤 직원에게도 낮은 연봉을 준 적이 없다.


연봉이 낮다는 기준은 철저히 주관적, 받는 사람 입장이다. 회사는 직원에게 늘 고연봉을, 그들의 능력에 비해 넘치게 주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왜 분골쇄신 안 하냐며 물음표의 낫을 던지며 채근하는 것이었는데 또 잊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구나하며 셀프 디스의 술 한잔을 삼키리.


그렇게 다시 낙향한 선비처럼, 재야의 청빈한 선비처럼, 무엇을 하며 살지에 대한 깊지만 길지 않은 고민을 수시로 하는 삶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는 게 걱정은 되었지만, 걱정만 하며 있고 싶지 않아 몸을 움직여 찍찍이로 머리카락을 제거하고 물걸레 청소포에 세정제를 뿌려 촉촉이 만든 후 집안 이곳저곳을 문질렀다.


집안을 밀대로 밀고 다니는 동안 마음의 고랑이 다소 정리가 되었다. 역시 생각 정리에 몸 쓰는 일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 이어졌고 청소를 마친 후에는 자연스러운 전개가 되어 청소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마케터에서 청소알바가 되는 데까지 어려움은 하나도 없었다.


청소를 원하는 가정이나 사무실과 일자리를 찾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에 가입하고 간단한 개인정보를 등록하면 끝.


세정제와 찍찍이, 행주, 여분 양말과 앞치마 등을 챙기며 폭탄 맞은 집만 아니길 바라며 간 곳은 보기에는 멀끔하나 스캔과 동시에 탄식이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청소 시간으로 주어진 3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온몸의 근육을 적극적으로 이완하고 수축시키며 탄력적으로 청소에 임했다.


가사도우미가 된 나를 보고 지인들은 무엇이라 할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의미가 발견되는 일을 하며 사람에 베인 상처를 치유하는 게 더 급했다. 내 노동이 필요한 곳에서 존재의 이유를 끌어올려야 했다.


강렬한 탱고 한판을 춘 듯, 허공 어딘가이지만 강렬하게 꽂힌 시선으로 춤에 몰입하던 여인의 향기 속 알 파치노가 흘리던 땀 같은 것이 청소를 마친 후 나에게도 베어났다.


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아직 뭔가 할 수 있었다.


청소 알바 3시간의 급료에 더해진 괜찮은 감정보상이라 뿌듯해하며 안녕을 고하는 내게 고객님이 말했다.


또 오실 수 있어요?

그렇게 두번째 스케쥴 확정!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은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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