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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Jun 14. 2024

당신이 그랬듯, 나도 당신의 빌런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남깁니다. 성실하지 못한 글쓰기를 하고 있음에도 들러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대출금, 생활비, 누구 하나 책임져 줄 사람 없는 나의 노후에 대한 비상금.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도저히 퇴사할 수 없었다.


뭔가 풀리지 않거나 할 때 혼잣말로 욕하는 버릇이 있는데, 회사 다니던 시기에는 그 욕을 복화술로 했어야 했지만 지금은 맘껏, 양껏 실컷 내뱉는 기쁨이 충만하다.


비직장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주 목청껏 욕을 내질렀다. 그리고 따라오는 묘한 쾌감.


요새는 욕을 너무 습관처럼 거의 모든 감탄사에 붙여 쓰는 것 같다는 게 인지되어 고쳐보려 한다. 하지만 이 정도 카타르시스도 안 느끼고 사는 인간 있나 싶어서 오늘도 보류.


퇴사하여 자연인이 되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던 시기, 회사 밖의 세상에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자의 20, 타의 80으로 3년 전 처음 무직자가 되었을 때와 올 초, 자의 0, 타의 100으로 한 번 더 무직자가 된 지금, 나는 어쨌든 살아남았고 살아가며 살아갈 것이다.


밥줄을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직장인 시절부터 사부작사부작 작게 시작한 과외수업이 명맥을 유지하여 집에 쌀 떨어질 걱정은 안 하고 있다.


문이 닫히면 창문이 열린다더니 나는 방충망까지 닫히는구나 하는 심정이었는데, 닫힌 창문 틈새로도 벌레는 기어들어오듯, 삶을 지속할만치의 공기와 빛은 어느 틈으로든 새어 들어왔다.


어느 순간 환기된 것이, 내일 아침에 대한 두려움이 현격하게 사라졌다. 여전히 잠은 잘 이루지 못하지만 오늘밤 잠들지 못하니 내일 정오까지 푹 자버리지 뭐 하는 기쁨의 태만이 일상이 되었다.


누군가는 회사를 떠나 유유자적, 안빅낙도 하는 나를 부러워할지 모르나 자발적 저소득자의 삶은 아무래도 녹록지 않다.


몽골에서는 3500만 원이면 아파트를 산다는 얘기에 몽골 가서 살아볼까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태평한 한심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이 시간 글을 쓰며 무직자의 삶을 만끽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제 불혹을 훌쩍 넘어든 나를 회사도 더 이상 원치 않을지 모르는데 자발적 저소득자이니, 회사를 가고 싶지 않아 선택한 삶이라느니를 읊조리는 나를 보고 메타인지 수준이 심각하다고 할지 모른다만 최근 문득 든 생각.


그러니 저러니 해도, 월급 70만 원 홍보대행사 인턴으로 시작해서 디지털 마케팅, 특히 인플루언서 마케팅 분야에서 시조새처럼 일해온 나의 15년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마케터로 현직에 있으며 마주한 수많은 대행사 담당자들, 그리고 인하우스의 마케팅 담당자들의 함량미달을 목도하며 대체 어디서 뭘 배워왔나 하는 탄식을 속으로 삭이느라 내가 이 지경이 됐을까?


무릇 마케팅이라 함은~ 하고 한 곡조 뽑아내듯 포효하고 싶은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자포자기가 되어 혼자 이거 저거 끌어안다 보니 연봉은 올라갔지만 나는 제 발로 암흑에 걸어 들어갔다.


제대로 마케팅할 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마케팅 바닥에서 버티고 견디어 온 나의 시간이 어딘가에 쓰이면 좋을 텐데 싶다가도, 누가 알아주랴 그저 어찌 찜 쪄먹고 이용해 먹을지만 호시탐탐 노리는 하수종말처리장 같은 세상에 들어가느니 그냥 살겠다는 마음으로 귀결되는 순간이 일주일에도 서너 번.


그러다 또 하나 환기가 되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고 싫어하며 저주를 간절히 바라는 얼굴들, 내 인생의 데스노트에 적힐 빌런들을 생각하다 깨달았다.


나에게는 그들이, 그들에게는 내가 빌런이었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빌런이었을지도.


본인이 부하게 보이는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고 새벽 3시에 전화해 길길이 분노를 터뜨리던 EX대표님.


그날은 일요일, 추가 수당도 주지 않는 밤의 행사였고 나는 새벽녘이 되어 퇴근하던 길이었다. 본인은 오른쪽이 더 예쁜데 왼쪽으로 찍힌 사진이라며 크게 화를 냈는데, 내가 그녀에게는 얼마나 심한 빌런이었겠는가..


내 입장에서는그나마 날씬해 보이는 괜찮은 사진이었는데, 어쨌든 난 빌런인 것이다.


그녀와 가깝게 지내는 VIP고객들에게서 저분 살 빼라고 얘기 좀 하라는 말들을 들었지만 내 사진기술이 좋았다면 그렇게 길길이 뛰었겠는가.. 내게 무슨 의도냐며, 명품을 휘감고 늘 고상함을 유지하던 그녀가 나 *먹일라고 하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접시물에 코를 박아도 시원찮을 빌런이었던 것이다.


안빈낙도의 삶, 수년 전의 나였다면 손가락질하며 한심해할 삶을 살고 있는 요즘에서, 나는 깨달아간다.


나는 빌런이었다. 당신들이 내게 한 것만큼이나 나 역시도.


그래서 나는 격렬하게 소망하고 갈망한다.


무해한 삶, 극도로 무해한 삶.


한낮의 맥주 한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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