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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Jul 07. 2024

내가 지금 놀고먹는 것은

좀 한심하게 살면 안되는가?

나는 가난했다.


구구절절, 그 어떤 설명을 붙일 필요 없이 가난했다.


기숙사가 없는 학교를 다녔고, 자취는 꿈꿀 수 없는 흙수저에게 5시간 왕복 통학시간은 불만 내지는 그 어떤 부정의 내색도 내뱉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수능이 끝난 후부터 부모님으로부터의 모든 재정적 지원은 사라졌다. 예상했던 당연한 것이었고, 받아들여야 했던 나의 '팩트'였다.


헐벗지는 않았으나 굶주렸고, 배고팠으나 배고픔을 말할 수 없던 대학시절을 거쳐 셀 수 없이 많은 공채 시험에서의 불합격, 그래서 파격적으로 눈을 낮춰 취업한 곳에서의 부당한 해고들에 질려 될 대로 돼라 싶어 졌을 때 자포자기 상태에서 아주 작디작은 마케팅 대행사의 정직원이 되었을 때, 매달 갚아야 하는 집의 부채가 있었으며 월급에서 차 떼고 포떼고 남는 것은 20만 원이었다.


나의 20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 20만 원이었다.


30대는 그래도 10만 원은 플러스되리라 하는 아스팔트 바닥만도 못한 낮은 자존감으로 맞은 서른.


여차저차의 과정을 거쳐 나이의 앞자리와 동일한 숫자가 들어간 월급을 받으며  배고픔과 이별했더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나에 대한 투자를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대학원을 갔으나 녹록지 않았다. 석사 2학기를 마칠 때 즈음에 치른 졸업 영어 시험에서 시험에 응시한 모든 인원 중 단 2명의 탈락자 중 하나가 나였다. 나머지 한 명은 중국인 유학생.


수능도 보고, 인서울도 했는데, 이 정도 영어 실력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집 근처 윤선생영어교실에 찾아가 문제집을 2권 사와 풀어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너무 어렵다.


대학원이고 뭐고 간에, 이따위 영어실력으로 커리어 업은커녕 석사 졸업도 요원하겠구나 하는 모멸감과 수치심, 자괴감에 하루를 괴로워하다 영어공부를 결심했다.


그것은 2012년 3월 1일.


그리고 2013년 9월, 그간의 영어 공부에 대한 실력 테스트 차원에서 응시한 테솔 자격을 취득하며, 이것을 증빙자료로 하여 공인영어시험 성적 없이 외국계 회사, 작디작은 그곳으로 처음 입성한다.


그리고 2015년, 미국계 회사로 이직하며 태어나 처음 미국땅을 밟게 되었고 그 후로 늘 영어를 쓰며 일하다 2021년, 극도로 심각한 우울증으로 반드시 휴식해야 한다는 전문의 권고를 받아 길었던 십수년간의 직장생활을 마감하며 반 송장으로 누워 한 계절을 보내다 뭐라도 해야 먹고 살겠다는 절박함으로 어린이 화상 영어수업 튜터를 시작했다. 급격히 낮아진 수입 탓에 이러다 밥굶기 딱 좋은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 때 놀랍게도, 청춘과 맞바꿔 쌓아올린 작은 어학 잔재주를 찾아주는 은인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2024년 여름의 지금, 매 순간 내일의 영어 수업 자료를 고민하는 영어튜터가 되었다.


40대가 되면 마케팅 이사 정도는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달리던, 천직이라 믿었던 마케터의 인생, 그 챕터를 넘겨 새 챕터를 종종걸음으로 살아간다.


일찍 일어나면 9시, 보통은 10시가 되어 일어나 레몬오일을 두어 방울 떨어뜨린 물 한잔을 마신 후, 키워서 곧 고기쌈으로 먹겠다며 야심 차게 키우고 있는 상추와 겨자잎에 물을 주고 창밖을 응시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마치 낯선 이의 집 구경을 온 것처럼 거실과 베란다 인근을 서성이며 흐트러진 것들을 원위치시키는 소일거리를 하다 컴퓨터 앞에 앉고 오전 수업이 있으면 수업을, 그렇지 않으면 그날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수업 준비를 한다.


그러다 배고프면 느지막이 아점을 먹고 때로 냉장고에 남은 술을 발견하면 얼씨구나 하고 곁들이기도 한다. 참고로 이 시간은 필경, 이르면 정오이고 보통은 오후 2시, 또는 3시이다.


외출을 하여 방문하는 수업이 있으면 제자들에게 보일 수 없는 나의 험한 몰골을 감추기 위해 속성 화장을 하고, 아니면 낮술 걸쳐 기분 좋은 느낌으로 또 수업을 위한 교재를 만들거나, 명색이 영어튜터라는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강의를 듣거나 공부를 한다.


그늘진 나의 서재. 선풍기는 빵빵하고 햇빛은 들지 않으며 좋아하는 향기로 채워 아늑하다.


때때로 은행 갈 일이 있으면 은행을 가고, 도서관 갈 일이 있으면 도서관을 간다.


공포가 엄습할 정도의 평화이며 행복이다.


불행 없는 나날들.


그 속에서 이렇게 유유자적, 약 5년 전의 나였다면 거침없이 한심하게 놀고 자빠졌다 할 이 삶을 살아도 되는가에 대한 죄의식이 밀려올 때가 있다. 사실 많다.


이 삶을 산 지 초기에는 그 죄의식에 안절부절못해 벌떡 일어나 하다못해 청소라도 하였으나 점차 계절이 지나며 마음은 죄스러우나 몸은 침대에 들러붙거나 취기를 머금고 드러눕는다.


나의 20대는 매우 가난하여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매 순간 허투루 살지 못하며 종종거렸다. 그 시기의 죄의식은 대부분 독서로 갈음되었다.


그나마 먹고살만해진 30대,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다가 뒤늦게 자각된 그 어떤 기술도 스펙도 없음을 환기하며 시작한 영어공부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반 영어학원을 다녔고 퇴근 후에는 그 달의 월간 굿모닝팝스에 나오는 모든 회화문장을 외웠다. 더불어 잠들기 전에는 전화영어를 매일 했고 토요일에는 월급을 쪼개어 일대일 영어과외를 받았다.


그렇게 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30대 중반이었고, 수시로 해외를 드나드는 일을 하며 영어로 이메일과 보고서를 쓰는 삶을 살았다. 매월 입금되는 급여의 앞자리도 달라져있었다.


20대와 30대를 돌이켜보면 배고팠다가 바빴던, 최소 4배속으로 필름을 돌리는 세세한 내용 파악이 안되는 영상으로만 남아있다.


그 시기 내 옆에 있던 연인은 말했었다.


'넌 왜 이리 절박하게 사니? 제발 좀 그러지 마라. 지긋지긋해.'


주말마저도 아침 9시에 시작해 모든 일과를 마치면 헥헥대며 오후 5-6시를 맞아 드러누워 유치한 아이돌들의 예능을 시청했다. 한주의 모든 스트레스와 찌들음을 한 번에 녹여주던 강력한 당분 파워였다.


그마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는 피곤함에 텔레비전은커녕 그냥 잠자기로 남은 주말을 소각해 버렸다. 당연히 연인과의 시간도 추억도 기억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막장드라마 따위는 우스운 수준의 만행을 저질렀고 우리는 남남이 되었다.


여차저차, 빈곤과 치열함의 20대와 30대를 건너 나는 현재 그 어떤 곳에서도 소속되지 않은, 직장생활 내내 그토록 강렬하게 꿈꿨던 '프리랜서'의 삶을 나태하고 살고 있다.


때때로 통장 속 숫자에 두려움이 일어 이제라도 회사를 가야 하는지에 대한 번민에 종종 휩싸이지만, 그조차 내가 가고 싶을 때 은행 가고 도서관 가는 자유와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수준인지라 '에라 모르겠다!' 하며 술 한잔을 들이켜는 서울 사는 자연인의 행태로 귀결된다.


ENTJ의 성향의 나로서 때로 내가 한심하며 때로 기특하다.


가장 빛나야 할 시기, 참으로 어둑하고 낮게 움츠리며 양지로의 비상을 소망하던 날들에 한심하지 않았던 댓가로 내가 지금 한심하게 살고 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노력은 배신했고, 사랑은 비겁했으며, 진심은 폐기되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살아 버텨 일단 있는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닥치는대로 행복하기로 했다.


내 청춘이 피흘려 쟁취한 일상이다.


곧 다시 타올라 보겠다. 단, 옛날처럼은 아니고 멋있고 기품있게. 나는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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