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충 Oct 29. 2020

첫사랑의 잔상(1)

그녀의 첫사랑은 아메리카노 맛



모든 첫사랑의 기억이 아련하리란 법은 없다. 그녀 역시 그랬다. 희영에게 첫사랑의 기억은 쓰디쓴 아메리카노의 첫 모금 같았다. 이렇게 쓴걸 사람들은 왜 먹나 하며 또다시 찾게 되는 아메리카노처럼 그는 20대 초반 희영의 마음속을 들락날락했다. 물론 매번 쓰디쓴 맛을 보았지만.






희영이 첫사랑은 주환이었다. 스무 살의 주환은 희영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의 짓궂지만 통찰력 있는 말투가 좋았고, 시니컬한 웃음 뒤의 선량한 눈망울이 좋았다.


일 년 전 그가 희영의 가게 입구에 들어선 순간 희영의 첫사랑의 기억은 다시금 살아났다. 쓰디쓴 아메리카노의 원두찌꺼기가 남아있는 마지막 모금 같은 기억과 함께.


그때의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이어가는 이유는 가게 운영 후 수공예품 판매 온라인 플랫폼에서 작은 인터넷 상점을 연 뒤에 들어온 몇 안 되는 주문 중에 그의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익숙한 휴대폰 번호 역시 그의 주문임을 알아채는데 한몫했다. 아내인 것으로 보이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메시지 카드 요청 문구란을 희영은 소리 내어 천천히 읽는다.


"수정아 서른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 오롯이 너와 나의 삶을 이어가는 날들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해."


얘가 원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애였나 싶은 생각을 하며 얼마 전 배운 캘리그래피 실력으로 연보랏빛 카드에 한 자 한 자 적어낸다. 희영의 기분이 이상해진다.






일 년 전 주환의 등장은 희영에게 꽤나 강렬했다. 딸랑이는 종소리를 울리며 가게에 그가 들어섰다. 입구 쪽에 새로 들여놓은 화분을 대충 살펴보더니 카운터 쪽으로 눈을 돌린 그는 십여 년 전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첫마디를 건넸다.



  "설마 했는데 맞네? 희영아 오랜만이다?"


  "아 주환이 맞지? 안녕?"



사실 그가 가게문을 열기도 전에 희영은 그를 알아봤다. 살짝 풀어진 셔츠 매무새와 단정한 신발. 누가 봐도 멀끔한 직장인으로 보이는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예전의 모습이라고는 뒤죽박죽인 반곱슬 머리뿐이다. 하지만 그가 주환이라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어색한 미소로 그를 보던 희영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죽박죽이 됐다. 그와 피던 담배냄새, 학교 앞 후줄근한 분식집에서 함께 먹던 떡볶이와 소주의 맛, 피시방 한편에서 함께 온갖 욕지거리를 하며 뛰던 레이드..


막무가내식으로 희영을 잡아 흔들던 예전의 주환은 등장만으로도 아직 그러기에 충분했다.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니 가게 근처 기업 연수원에 온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와이프 생일이라 선물할까 싶어서.. 뭐가 괜찮니?"


"음 저녁때 전해줄 거면 화분이나 드라이플라워도 괜찮고 아니면 가기 전에 들러서 생화 꽃다발 들고 가."



희영은 순간 아차 싶다. 또 보고 싶어서 이런 말이 나왔나?

부끄러움이 스치며 뺨이 붉어지려는 참에 그가 말을 이어간다.



"그래 그러면 드라이플라워랑 화분 알아서 좀 골라줘."




새로 들인 노란 소국을 포트분에서 꺼내 흰색 도기 화분에 옮겨 심는다. 어제 대충 묶어놓은 드라이플라워를 크라프트지와 리본으로 포장한다. 종이가방에 넣어 정리할 때쯤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스민다.



"여기 계산."



그가 파란색 신용카드를 건넨다.



"아니야 아니야 뭘 오랜 친구한테 주는 선물이야. 돈 안 받아."

 


뭐 누구한테 주는 선물인 거지? 지 와이프가 내 오랜 친군가?  뭔 개소리를 한 거야 생각하며 또 희영의 얼굴이 붉어진다.


씩 웃으며 그가 말을 이어간다.




"저녁때 잠시 시간 괜찮아? 마치는 시간 언제야? "


"오늘 저녁 타임에 수업 있어서 좀 곤란한데.."


"그럼 점심은 먹을 거 아냐? 같이 먹자. 앞에서 기다릴게 정리하고 나와."




여전했다. 두리뭉실한 거절의 말을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로 수락으로 바꾸어내는 말발이. 저 말발에 몇 년 동안 그에게 흔들린 희영이 다시 흔들렸다.









                             -첫사랑의 잔상(2)에서 이어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