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직장수필 04화

후배에게 1

이가는 듣거라

by 화상 바오로

선배로서 얘기하고자 하네. 자네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나 또한 대관업무를 담당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네.

감사관의 요청이 무례하다는 점에 대하여는 자네도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걸세. (권위 있는 기관의 공식적인 자료도 아니고, 구글링을 해서 찾은,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잡지 투고 내용을 번역해 달라고 떼를 쓰는 건 세상 처음 보는 일이네.) 물론 또한 이와 같은 감사관의 무리한 요구에는 적정한 '성의'를 표하는 것이 대관업무의 정석이라는 것에 동의하네. 해서 프로토콜에 따라 나는 이번 요구에 대해 충분한 성의를 표했네. 내가 직접 주말에 시간을 내어 요청자료를 요약 번역해서 제출하지 않았나. 이는 팀장 자리에 앉아 팀원들에게 고유 업무가 아닌 일을 지시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네. 또 감사관도 그만하면 족함을 알고 물러서야 하네.

이처럼 관례적인 성의표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자료 전문에 대한 번역을 요구하는 감사관을 나는 이해하기 힘드네. 자료 전문 번역을 요구하는 목적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은 가지만, 그 짐작이 전부라면 나는 수용하기 어렵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네.

먼저 감사관 또한 무리한 자료 요구라는 것은 인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렇다면 감사관은 과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내게 부탁하는지 알고 싶네. 내 마음에는 그의 그러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네.

다음으로 자료의 용도가 마음에 걸리네. 감사관은 이미 틀을 짜 놓고 그 안에 모양이 다른 재료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일세. 방대한 자료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한 줄, 한 단락만 발췌하여 조직에 위해를 가하려 하는 상황에서 감사관의 요구에 협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상황은 '펭귄도 조류에 속하니 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우기는 상황 아닌가? 번역자료에는 '펭귄도 (퇴화된) 날개가 있다'라는 정도의 내용이 있을 것이고, 감사관은 이를 근거로 날지 못하는 새를 조류 동물원이 구입하였다는 것을 꾸짖고자 함이 아닌가?

그러나 감사관의 억지 요구는 그렇다 손치더라도, 이에 대해 감사실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점에 대하여는 아쉬움이 크네. 외부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기더라도 상당한 비용이 발생할 텐데, 무슨 근거로 이를 공식적으로 처리하겠나? 우리 부서의 공부 목적이라고 하기엔 우습고, 감사원 제출용이라고 하기엔 해괴하네. 나쁘게 보면 동료직원들에 대한 배신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나? '나쁘게 보면'이라는 말이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지금 감사관들이 시각이 바로 '나쁘게 보는' 것이 아닌가?

나 또한 대관업무를 하면서 무리한 요구를 받은 적이 있네. 그리고 그때마다 현업부서의 협조가 절실했네. 다만, 현업부서 앞 협조 요구는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네. 그렇지 않으면 순간의 협조는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인 협조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세. 하여 합리적이지 않은 요구사항은 내 선에서 처리하도록 노력했네. 직제규정에 보면 기획부의 업무로 '그 밖의 사항들'이라는 모호한 문언이 있네. 나는 동 문언에 기대어 A부서가 제출했어야 하는 자료를 내 이름으로 내보내기도 하였고, 여러 부서에 걸쳐있는 업무인데 'single point of responsibility'가 부재하여 결국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여 부서 간 분쟁을 막은 적도 있네. 대관업무의 어려움과 보람은 그런 것이라고 알고 있네. 나를 적당히 희생해서 모두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노력/희생에 대하여 조직이 보상하는 것.

매일매일의 감사관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네.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짐이 생길 텐데, 빨리빨리 그 짐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네. 그러나, 갑갑할 때면 잠시 한 발 물러서서 큰 그림 속에서 생각해보게. 그러면 답이 보일 것이네.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이를 닫힌 계가 아닌 열린 계를 상정하여 총체성을 담보하는 기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네.

번역과 같은 어찌 보면 하찮은 일에 이렇게 길게 글을 쓰는 것도 자네, 우리 조직, 그리고 세상살이의 상식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 번역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알려주게. 후배의 어려움을 끝내 내가 모른 체하진 않겠네. 다만 내게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게 이 쪽 업계 양식이니 그냥 좀 해주세요'라고 말하지만 말게. 시오노 나나미의 '베네치아 이야기'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네. "양식이란, 피동적인 처지에 놓인 측이 입에 올리는 말이다. 행동의 주도권을 쥔 측은 언제나 비양식적으로 행동하는 법이다." 우리가 피감기관이니 피동적인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은 맞네. 그러나 주어진 여건 하에서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범위 내에서는 비양식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를 기대하네.


PS. 글의 제목은 이 글을 먼저 읽은 와이프의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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