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배는 힘겨운 싸움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저는 오히려 가장 손쉬운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내게는 쉬운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개인 능력의 차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싸움은 조직의 오래 묵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싸움이고, 과거 저 또한 그 싸움의 전면에 나선 적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손쉬운 싸움'이라고 판단하는 대상은 목표 달성의 수월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를 설명드리기 전에 책임과 주체성에 대한 짧은 일화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815년,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프랑스군은 6월 16일 리니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파해 퇴각시키고, 6월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지만, 퇴각했던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이 다시 기습을 하여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결국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 영국군의 합동 공세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하였습니다. 이 패배의 결과는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반동 복고적인 빈 회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복권되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나누어 자신이 영국군을 상대하는 동안 그루쉬 장군에게 프로이센을 방어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프로이센 군은 그루쉬 장군을 정면에서 상대할 생각이 없고, 오히려 영국군과 합세해 나폴레옹 군을 궤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나폴레옹 군을 포격하는 소리도 연이어 들려옵니다. 이에 그루쉬 장군 휘하의 부하들은 황급히 황제의 군대와 합류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눈앞에 뻔히 보이는 상황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루쉬 장군은 "그럴 순 없다. 소규모 부대를 다시 나누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내 임무는 프로이센 군을 추격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황제의 명령에 반해 행동하기를 거절합니다. 장교들은 못마땅해하며 침묵하고, 그러는 동안 역사의 결정적 순간은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갑니다.
이 상황을 두고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저술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그가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눈앞의 징후를 제대로 판단하고 명령을 어길 용기를 내기만 하면 프랑스는 구원될 것이다. 그러나 주체성 없는 사람은 늘 명령서에 따를 뿐, 운명의 부름에는 절대 따르지 않는 법이다."
... 이 싸움은 CEO께서 현행 제도가 합리적이냐고 질문한 데 대하여 실무진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그렇게 답하고 나면, CEO의 지시사항은 명료해집니다 - 그렇다면 제도를 바꾸도록 노력하라. 다시 말하면 이러한 문답 과정을 통해 CEO는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책김을 면할 수 있습니다. 물으니 그렇다고 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일 뿐이다. 일차적 책임회피 행위는 이렇게 발생합니다.
저 또한 제도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행 제도를 바꿔야 할 만큼 필요성이 크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필요성이 있다면 분명 여러 경로를 통해 문제 제기가 있었을 것인데, 현업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의 짧은 시야를 보완하는 CEO의 혜안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과거 수 차례 제기되었던 문제를 다시 한번 제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굳이 왜 지금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이후로 벌어진 일들은 선배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갑자기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이 싸움은 조직 전체의 미래를 좌우하는 싸움이니 전 직원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애사심을 호소했고,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례 수집에도 나섰습니다. 당연하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제도를 개편하려면 그 사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현행 제도로 인하여 발생하는 피해가 심각하며, 제도를 개선하여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사심과 자존심만을 전면에 내세웠지, '왜'에 대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직원들은 나라님이 느닷없이 심야 수중전을 펼치기로 하고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애국가를 틀면서 국민 총동원령을 내린 상황으로 보는 것입니다.
선배님도 잘 아시다시피 이 싸움의 결론은 어떻게 날 지 모릅니다. 만만찮은 상대가 존재하는 싸움이고, 몇 번이나 시도했던 (그리고 성공하지 못했던) 싸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싸움의 필요성이 크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싸움을 전면에서 담당하는 직원들도 '시키니까 싸우겠지만,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시키는 일은 했다'라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싸움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제 예측은 십중팔구 직원들만 고생하고, 거두어들일 수 있는 과실은 크지 않습니다. (혹여라도 아주 조그마한 과실이라도 챙긴다면 분명 'CEO의 비상한 관심과 전 직원들의 피땀 흘린 노력이 이와 같은 훌륭한 결과를 거두었습니다'라고 광고할 것입니다) 게다가 상대방을 완벽히 제압하지도 못한 채 원망만 남길 가능성은 100%고요. 그러니 CEO가 시켰다고 해서 전후좌우 자세한 사정은 따져보지도 않고 냉큼 '예'라고 말하는 자는 그루쉬 장군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참고로, 그루쉬 장군은 나폴레옹의 패망 후에도 잘 삽니다. 이차적 책임회피 행위는 이런 식으로 발생합니다.
손자병법은 가급적 싸우지 말라고 했고,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이길 싸움만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싸움은 소모적인 것이기 때문에 철저한 전략을 세운 후에만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서 이 싸움은 쉬운 싸움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시하는 대로만 하면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이들의 헛된 노력에 대하여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 이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주체성을 스스로 내려놓는 발언이며 조직의 건강을 좀먹는 발언입니다. 식민지 근성의 연장인 반일이 쉬운 이유입니다. 항일이 되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선배님께서도 이번 싸움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이처럼 필요가 분명치 않은 대규모 토목공사가 개시되면, 신민의 의무로서 함께 돌멩이를 짊어지고 나르시되, 채찍을 들고 다른 신민들의 등짝을 후려치는 십장이 되려 하지는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