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직장수필 02화

선배에게 1

임원모집 공고

by 화상 바오로

... 그 선배는 후배로서 바라볼 때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자신이 평생 업으로 삼아왔던 일에 대한 전문성과 자부심, 그리고 나쁘지 않은 선배에 대한 시장의 평판 등을 감안한다면 그는 보다 많은 것을 이루고 무대에서 내려와도 좋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람직한 조직의 모습에 대하여 자신만의 비전도 가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을 조금씩 떼어 나눠주기도 하던 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인의 꿈은 그가 자신의 꿈을 현실에서 펴 보일 수 있는 지위에 올라야만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아쉬움을 토로하며 선배가 반복해서 하던 얘기는 선철같이 느껴졌습니다. 선배가 풀어놓는 이야기에는 아쉬움과 분노의 비중이 너무 높았습니다 - 그래서 순도가 낮았습니다. 목과 가슴팍이 유난히 두꺼워 강인한 이미지를 지닌 그가 쉽사리 부서질 것 같다고 느꼈던 이유입니다.

... 언젠가 마주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똑바로 바라본 그의 눈은 맑았습니다. 천진난만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좀 남사스러운 얘기를 비밀스럽게 할 땐,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어린아이처럼 혀를 쏙 내미는 버릇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제가 그를 마음에 두기 시작한 것은 그가 꿈꾸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종내에 내어놓아야 할 운명을 걱정하며 정년에 도달할 때까지 탁한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던 몇몇 이들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함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그의 몇 가지 치명적 단점으로 인해 가려졌고, 동료들은 그를 어리숙한 사람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하여 술자리 안줏거리로 삼았습니다.

... 그를 회상하는 저도 잘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적극 그를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는 얘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맞장구쳤지요. 다만, 그가 오랜 직장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회사 문을 나섰을 때 30년 세월의 손때가 묻은 물품들을 아무렇게나 실은 구루마를 끌고 뒤따라 나섰을 뿐입니다. 선배는 그 정도만으로도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큰 짐을 옮기고 난 후 주섬주섬 나머지 소지품을 챙겨 마지막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낯선 이와의 조우에 당황하지 않게,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망설여지는 이들과의 작별인사가 어색하지 않게, 혹여나 아무도 타지 않는 엘리베이터에서 메아리치는 적적함에 무너져 내리지 않게, 흰머리가 난 후배가 옆에서 어깨를 슬쩍 맞대고 있어 줬을 뿐입니다.

... 사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부터 하는 얘기입니다. 그 선배 또한 임원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임원 공모 안내문이 게시되었을 때 그 또한 정성껏 지원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작문을 처음 해 보는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워하며 제게 리뷰를 요청했습니다. 지원서를 넘겨주는 손을 통해 그의 긴장감이 제게 전달되었습니다. 저 또한 마치 옆 반 여학생 일기를 훔쳐보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마음이 되어 숨죽이며 지원서를 읽었습니다.

...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A4 용지 두 장에 걸쳐 듬성듬성 쓴 맥락 없는 사실들의 나열이 과연 30년 직장생활의 요결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게다가 조직의 임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쓴 것인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본인의 장점을 기술한 내용에서는 선배의 장점이 읽히지 않았고, 본인의 자격을 기술한 내용에서는 그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읽혔고, 본인의 포부를 기술한 내용에서는 자신의 행적만을 길게 늘어뜨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조직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난데없이 우리 회사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뜬금없는 답변으로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저는 본분을 망각하고 선배를 닦달했습니다. 이게 뭐냐? 처음부터 다시 쓰시라. 묻는 질문에 정확히 답변하시라. 과거만을 얘기하지 말고 비전을 얘기하시라. 최근 2년간의 얘기만 쓰지 말고, 30년 직장생활 전체를 되돌아보시라. 본인이 한 일을 평면적으로 기술하지 말고 그 업무를 통해 조직발전에 기여한 내용을 쓰시라. 본문에 담으면 산만할 수 있으나 그냥 버리기 아까운 내용은 별첨 자료로 작성하시라.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쓰시라. 당신이 적자라고 쓰시라. 전문용어는 가급적 억제하고 평이한 말로 쉽게 읽히도록 쓰시라. 지원서를 보다 organize 된 방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하시라. 강조할 내용과 그렇지 않은 내용은 구분하여 서술하시라. 궁서체를 버리고 휴먼 명조체로 하시라... 당신이 사장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이 쓴 내용을 다시 읽어보시라. 선배는 잠시 멍한 눈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이윽고 정신을 추스르고 고맙다고 말하면서 잠시 앉아 수정을 좀 해 줄 수 있겠냐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하면서도 그 순간 다른 이들이 하던 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그 선배 아직도 미련 못 버렸대?', '이미 임원 될 사람은 다 정해져 있는데, 뭣하려 헛 힘쓰는지 몰라...'



... 오늘 선배님께 이런 얘기를 드리는 것은 선배님 또한 임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제넘은 얘기인 줄은 알고 있으나, 반드시 미리 지원서를 써 보시기를 권합니다. 임원 공고가 게시될 때 쓰면 늦습니다. 물론 선배님이 '이미 정해진' 분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요. 하지만 임원 지원만을 위해 글을 써 보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간정산'을 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중간정산을 해 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톺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아보는 것입니다. 금융인의 언어로 말씀드리면, 반기결산을 해 보고 연말 실적을 어림해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력서도 한 번 써 보시기를 권합니다. 단순히 언제, 어떤 부서에 근무했다는 식의 '내부용'이 아니라 본인을 노동시장에 내어놓는 그런 '진짜' 이력서 말입니다. 이력서를 써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조직을 떠나야 하는데, 그때 바깥세상에서 여전히 내가 쓸모가 있을지 여부를 이력서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쓸모가 있을 가능성보다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게 판단되면 지금이라도 은퇴 후 진로를 재설정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 아 저요? 제가 무슨 언감생심 임원 꿈을 꾸겠습니까? 물론 때가 되면 지원은 해보겠죠. 그나마 아파트 분양권 당첨되는 것보다는 확률이 좀 더 높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제 마음은 이미 제주바다에 가 있습니다. 은퇴를 하면 저는 더 이상 한 곳에 묶인 채 살기 싫습니다. 저의 엘도라도는 항상 해초 냄새가 싱그러운 파도가 들락날락하는 따개비가 잔뜩 붙어있는 검붉은 바위, 그 바위와 바위틈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위협하는 저를 집게발로 겁주는 작은 게가 참고동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곳, 바위 아래 물살이 잔잔한 곳에 손을 뻗어 동그랑땡 같은 앙장구를 한 주먹 건져 올릴 수 있는 곳, 그렇게 건져 올린 바다내음을 고슬고슬한 밥과 고소한 참기름에 비벼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네, 제가 자랐던 송정 앞바다의 풍경입니다.) 은퇴 후 잠시나마 그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이끼 낀 돌멩이와 소라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눈썰미가 늘고 성게 까는 실력이 늘 즈음 제주에나 한 번 놀러 오십시오. (해녀학교에 다니고 싶지만 제약사항이 좀 있더라고요. 나이 제한, 성별 제한, 거주지 제한 등) 멍게 껍질을 소주잔 삼아 다음 날 깨기 싫을 정도로 푸짐하게 한 상 차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때 당신이 농사지어 기른 채소도 한가득 들고 오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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