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익숙해지는 것이 불안하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실제로는 우연히 주어진 상황에 불과한 것을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던 권리로 인식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숙함에서 비롯된 권리에 대한 자각은 과거에는 익숙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호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차마 태어날 때부터 바람이 벗이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익숙함에 대한 두려움은 오래된 습관이다. 끼니때가 되어 물에 만 찬밥이나 먹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나는 낙천적인 성격의 동생과는 달리 어쩌다 평소 보기 힘든 비싼 간식거리를 먹게 되면 들떴던 것이 아니라 불안해했던 것이다. 간식거리가 뱃속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나면 오늘의 달콤함에 대한 기억이 내일의 달콤함에 대한 갈망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성 현재뿐 아니라 이미 지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현재마저도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예컨대 내일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하는 식의 두려움)은 일찍부터 내 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응사', 그리고 '응팔' 드라마 이후였을 것이다. 그것보다 조금 더 지난 과거를 더듬어보면 아마도 '건축학 개론' 직후였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관이 내게 매우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시점이. 그리고 동시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시점이. 90년대 대학생활의 향수에 흠뻑 젖어들게 해주는 탁월한 영상물의 도래와 함께 우리 사회의 주축 문화는 이제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나와 나의 동료들을 무대의 중심으로 떠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익숙함에 대한 불안감은 최근 음악으로 촉발되었다. 라디오를 틀면 장르를 불문하고 내 귀에 편안한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즈음부터 음악과 거의 단절된 생활을 해왔건만, 언제부턴가 운전 도중 라디오 음악에 맞춰 흥얼대는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희한하다고 생각한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엄습했다.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내가 익숙해진 것이 과연 라디오 음악뿐일까?'라고 자문해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나는 이미 많은 것들에 대해 익숙해진 상태였다. 나는 어느새 우리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어 있었고, 동시에 과거에 갈망했던 많은 것들이 상당 부분 이루어졌거나 최소한 사회적 담론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하고 정당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고용안정이 보장된 직장에 다니면서, 그리고 운 좋게 '벼락 거지'를 면한 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적 담론들은 그야말로 익숙했고 또 편안했다.
그렇지만 구태어 추구하지 않아도 삶은 충분히 구체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치열한 현장에서 한 발짝 비켜나 안정적인 조직의 관리자로 성장한 나는 분명 익숙해진 환경에서 고집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동료들도 나처럼 고집스러워지고 있었다. 고집을 부리는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선한 쪽에 속해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익숙함을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습성을 타고난 나만의 용렬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평가는 분명 한 조각의 진실을 머금고 있다. 익숙해져야 깃들일 수 있기 때문인데, 사귐은 그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말이다. 이는 사귐이 버겁게 느껴지는 나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뉴욕 3부작으로 유명한 폴 오스터는 자신의 또 다른 소설 '어둠 속의 남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로지 선량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자는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지만, 선량한 자는 자신이 선량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타인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익숙함에 대하여 의심이 짙어지니, 그리고 폴 오스터 덕분에 나의 선량함에 대하여 의심이 짙어지니 그간 나를 지탱했던 가치관에도 급속하게 혼돈이 찾아왔다. 가치관이란 판단의 기준이 되는,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익숙함의 요체이니만큼 중심을 잃은 나는 매사 사리판단을 어려워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희안하게 흐릿해질수록 뚜렷하게 맺히는 것이 있었다. 바람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마음에 서늘하게 맺힌 것은 삶에 대한 갈망, 혹은 하늘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혹은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을 제외한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그리움은 사람과 사물, 기억과 사실의 시공간 어느 지점에 분명히 존재하나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무엇이다. 전자구름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잔뜩 성난 벌처럼 심장을 마구 찔러대는 그것은 전자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리움이 미친 듯한 뜀박질을 멈추고 어느 순간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냈던 것이다. 날개가 바람을 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빚어낸 것이 날개였던 것이다.
그리움이야말로 익숙해지기 어려운 환영의 기록이기 때문일까? 환영이 점유하고 있는 영역은 관찰자의 존재가 본질마저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고정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한 그리움은 편재하고 있으나 어느 특정한 지점에는 존재하지 않아, 평소에는 모호하게 느껴지지만 삶의 가치관이 격랑에 휩싸이면 그제야 하늘과 물의 경계선에 선 등대처럼, 그리고 별과 땅을 이어주는 북극성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분명한 방향을 가리키며 익숙함에 대하여 가차 없는 진실을 선포한다. 익숙함은 반복되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서 반복을 갈망하는 마음의 감옥일 뿐이라고. 연속적이며 비분절적 시간에서 반복되는 것은 시간의 찰나적 성격뿐이며, 그 찰나는 결코 반복적일 수 없다고.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으면 그리움을 떠올려 보라고. 익숙함은 그리움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그리움의 선명성은 익숙함이 짙어질수록 확연해지는 보색 대비의 관계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익숙함이 만월처럼 커져버린 지금 언제나 따스하게 느껴졌던 그리움은 반대편의 달그림자처럼 차갑고 이지적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