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직장수필 08화

후배를 업고 선배를 모시는 삶 2

어른

by 화상 바오로

S 선배는 어른이다. 나는 어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를 한 경험이 쓰라렸기 때문이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누구 하나 어드바이스를 해 줄 이가 존재하지 않아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술만 마셔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졸업반이 되어서도 중세 프랑스어와 같은 과목을 수강하면서 Manon Lescaux가 쓰였던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황과 문학사상만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공부에서 착실하게 멀어져 가고 있던 내게 정신을 차리게 해 준 이는 같이 술만 마시다 결국 수도원행을 택한 고향이 구미인 한 친구였다. 100점 만점인 고급회계 시험에서 110점을 받는 희한한 능력을 가진 이 친구의 최후(?)를 목도하며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 친구보다는 세속적이었지만 대한민국의 똘레랑스 부족에 크게 실망하고 있던 나는 이대로 살다간 김진명의 소설 '직지'에 나오는 프랑스 수도원에 입회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서울이 집인 친구들은 엄마 아빠의 진두지휘 하에서 방향을 잡고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해서 나는 어른이 반가웠다. 어른이 곁에 있으면 멀리 돌아가지 않고 지름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뿔싸, 어른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나는 온곡초등학교 교장선생님*과 같은 어른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어느새 나는 교장선생님 훈시 시간에 발로 땅 파는 녀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 십 대에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사춘기를 사십 대에 정통으로 맞게 되었던 것이다.

* 개그콘서트의 박종철이 흉내 내어 유명해진 그 온곡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말이다.

사십 대의 사춘기는 의외의 상황에서 찾아왔다. 비유를 하자면 '어묵은 생선의 살을 으깨어 뭉친 뒤 튀겨서 만든 음식이다'라고 쓴 보고서의 문장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보게, 어묵의 재료가 생선살이라는 것이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제 고향이 또 부산 아닙니까?"

"음... 그렇긴 하네만, 어묵 모양이 아무래도 내가 알고 있는 생선의 겉모습까지 달라서 말이지." "아니 뭐 아무래도 살을 으깨 만든 음식이니까요..."

"음... 그렇긴 하네만, 생선이 재료라는 것을 확실히 하려면 지느러미나 아가미 모양이 명확히 드러나야 하지 않겠나?" "아니 뭐 애들도 먹는 음식에 지느러미가 살랑거리거나 아가미가 뻐끔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음... 그렇긴 하네만, 확실친 않으니 다시 조사해보고 내일 다시 얘기해보세." "네..."

나는 이러한 의심을 초기에 진화하기 못하면 큰 일로 번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S 선배 설득을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옆 팀원들에게 상황의 비상함을 전하고, 생선과 어묵의 연관성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기 위한 조사에 나섰다.

"선배님, 어묵의 재료가 생선살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권위 있는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어묵에 대한 정의도 검색하였고, 어묵공장에서 일하는 분의 인터뷰도 땄습니다" "음... 수고했네. 어묵에는 왜 지느러미와 아가미 모양을 그려 넣지 않았다고 하던가?"

"네, 그분은 굳이 그런 그림을 그려 넣을 필요가 없어서라고 하더라고요. 제작비도 많이 들고." "음... 그런가? 이 나라는 바로 그게 문젤세. 필요가 없다고 해서 뭐든지 대충 하려고 하니 말일세. 이러니 국민들이 먹거리 원산지에 대하여 의심을 갖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선배는 내가 어묵 산업계와 결탁한 것으로 보는 눈치였다. 이놈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삼촌이나 오촌 아제가 인터뷰한 어묵공장 공장장일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어묵 산업계는 중국산 물고기를 국산 물고기로 속이는데 능할 뿐 아니라, 오징어 다리 두 개를 잘라먹고 문어로 둔갑시켜 팔아먹는데 능한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던가? 공적 권위가 필요했다. 나는 여기에 대한 대비도 갖추고 있었다. 마침 팀원의 친척 중 하나가 해양수산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님, 저 해양수산부 과장과 전화 연결했습니다." "오... 그런가? 간만에 화상 군이 제대로 일을 하는군."

S 선배는 한 식경에 걸쳐 어묵과 생선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치밀한 질의응답을 이어나갔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던 나의 기대는 통화 말미에 "그렇다면 과장님, 혹시 공문 하나 보내주실 수 있나요?" 하는 말과 함께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정확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 합하면 천원은 됨직한 십 원짜리 욕이 따발총처럼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저어 선배님, 어떡할까요? 내일까지는 처리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쪽에서 공문은 안 보내주겠죠?" "음... 그렇구먼. 할 수 없지. 이렇게 하세. 그 문장에 '어묵의 재료가 생선살이라는 점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니, 사실관계 확인 후 보고 드리겠음'이라는 주석을 달고, 어쨌거나 해양수산부에는 공문을 보내게. 그쪽에서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위에 알려야 하지 않겠나? 아, 그리고 이번 주 후반에 어묵공장으로 출장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게."

김용의 사조영웅전에는 주백통이 쌍수 호박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쌍수 호박권이란 한 손으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네모를 그릴 수 있는 절정의 무공으로, 인격을 완벽히 두 개로 분리할 수 있는 이만이 부릴 수 있는 절기이다. 운기를 잘못하다간 쌍코피만 흘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경지에 도달한 이는 주백통 외 곽정, 황용, 양과 등 극소수의 인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S 선배는 분명 쌍수 호박권 어른파의 고수임에 틀림없다. 그는 그 부재를 통해 나의 허전함을 파고들었고, 그 존재를 통해 천근의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코로나 검사 3회 연속 음성 확인을 통해 드디어 만독불가침 지체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만했던 나는 아득한 강호의 넓음에 깊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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