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직장수필 07화

선배를 업고 후배를 모시는 삶 3

감투

by 화상 바오로

K는 감투를 사랑한다. 민틋하게 생긴 그것으로 머리를 가리는 순간 프로메테우스가 되어 매일 가슴이 찢겨 나가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아틀라스가 되어 하늘을 짊어지다 지쳐 결국 돌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을 알면서도 호시탐탐 감투 쓸 기회만을 노리는 것이다. K가 감투를 사랑하는 까닭은 로툰다처럼 생긴 이것이 참으로 영특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감투를 쓰면 길을 걷다 뜬금없이 '에헴' 해도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고(감투 없이 '에헴' 하다간 주위 눈초리가 따가워지는 걸 느낄 수 있는데),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손을 이마에 대고 주름을 잡노라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궁극의 아우라가 생기기 때문이다. (감투도 없으면서 뜬금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하면 우울증을 의심받는데) 그러나 감투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K를 세상 쿨한 오빠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즉,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아, 소로우와 같은 고요한 은둔의 삶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겠구나. 이젠 평소에 나를 존경하지만 괜히 어려워 보여서 말도 꺼내기 힘들었을 어린 후배들에게 나의 재능과 끼를 시러펴야 하겠구나.’

K에게 이런 기분은 낯설지 않다. K는 과거 천국의 길을 걷고자 하는 소녀들의 사주경계 대상 1위인 교회 오빠로 활약한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악마의 목구멍에서 기어 나온 적도 있는 신앙의 산전수전을 겪은 오빠가 들려주는 천로역정 이야기야말로 반짝이는 눈망울의 소녀들을 천국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을 (혹은 K의 넓은 가슴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우리 K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나 K야, 그거 아니? 회사는 교회가 아니고, 넌 더 이상 오빠라고 불리기엔 좀 징그러워.

감투병은 며칠 전 미세먼지가 감도는 어느 날 K가 회사 CEO와 가진 티타임 후 도졌다. 이 CEO는 K가 감투병이 있다는 걸 알 정도로 용의주도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아니면 내가 CEO 앞 죽을죄를 지은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선 밀림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는 게릴라를 잡는데 네이팜탄을 쏘는 게 아니라 낫을 던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낫이 정확히 내 정수리를 노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도살인이란 용어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팀장님, 또다시 감투를 쓰게 되었어요! 조직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이 중요한 시기에 제가 CEO로부터 감투를 하사 받았어요!" "음, 그러냐? 내 눈엔 잘 안 보이는데?"

"팀장님, 농담두 참… 감투가 안 보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나요?" "미안하다, 아무래도 잘 안 보이는데..."

"아, 아마 이번 감투가 좀 특별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제가 지금까지 썼던 감투들은 이번 감투와 비교한다면 사실 감투라고 말할 수도 없겠어요. 그간의 감투를 통하여 부여받은 임무는 상대적으로 단순했지요. 배부른 개 밥 주기(제가 그러다 크게 한 번 물렸지요), 수면 부족 고양이 깨우기(네, 얼굴에 삼지창 찍혔지요), 법회에서 알렐루야 삼창 하기(목탁 디자인 학과 다닌다는 친구로부터 제 뒤통수를 목탁으로 개조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요, 훗), 채식주의자 고기 먹이기(봄이 오고 있다는 걸 미나리 단으로 맞아서 알았지 뭐예요), 비 오는 날 대머리 아저씨들 우산 뺏기(아, 제가 그때 마침 팀장님 우산을 뺏았지요? 그때 맞은 뺨이 3주째 부어올랐던 기억이 아련하네요)... 아, 정말 많은 일을 했었지요.

K는 이 지점에서 파란만장한 직장생활을 회상하며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다가 꺼져가던 눈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 임무는 조직의 100년을 좌우하는 그런 일이에요. 조직원 모두에게 저만의 조직관리 노하우를 전수하고, 그들을 교화하여 마침내 처자식 내팽개치고 조직에만 충성하는 무적의 일개미 군단을 조직해내는 그런 임무예요! (점점 흥분) 저는 제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CEO님이 제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시고… 제게 간곡히 부탁하시는데... 크흑!" "그래, 상세한 설명을 들으니 이제야 그 감투가 보이는구나. 그런데 K야, 니가 조직관리자는 아니잖니? 모르긴 해도 CEO는 많은 직원들로부터 다양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 우리 K랑 차 한 잔 하자고 한 걸 거야…”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직장 분위기가 너무 구태의연하고, 효율성 제고에 대한 논의도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요즘엔 저처럼 일하는 친구들을 찾기가 힘들거든요. 제가 신입일 때는…” “으응, 일단 알겠어. 그런데 K야, 근데 오늘까지 처리해야 하는 거 있잖아… 그것부터 하자. 그리고 형이 예전에 경험해봐서 아는데, 웬만하면 새로 받아온 감투 벗자, 응? 그거 알고 보면 제대로 된 감투 아니야. 하지 마라~”

“네...” (풀이 죽는다)

K는 감투를 벗어 컴퓨터 앞에 놓고 밀린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업무 도중 잠시잠시 고개를 들어 감투를 바라보니 그게 그렇게 이뻐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감투를 벗은 머리가 그렇게 허전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하여, 감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걸 오후 내내 썼다 벗었다 하며 번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K야, 조직의 운명은 네게 달렸다. 팀장 놈의 헛소리에 꺾이면 안 된다. 니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라!”

K는 떨쳐 일어나지 말고 그냥 앉아서 일해야 했다. 그런데 결국 일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투를 푹 눌러쓰고 "전원 주목!" 했던 것이다. 아아, K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후배들 뿐 아니라 팀장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야이 XX놈아!” 하면서 신고 있던 쓰레빠로 K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 K의 감투를 일격에 백리 밖으로 날려버렸던 것이다.

K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패도지 후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감투로 둔갑한 마귀가 저만치 물러가는 것이 보였다. 오, 오늘에야 내가 진정한 이 시대의 퇴마사와 마주한 것일까? 팀장님이 맨날 숱 없는 머리나 매만지던 것이 사실은 고수의 퇴마의식이었던 것일까? K는 슬그머니 착석하여 보고서 작업에 매진했다. 팀장님은 감투 마귀에서 벗어나 땀 흘리며 보고서 작업에 매진하는 K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괜히 불안했다. 조금 전 K의 얼굴에 뭔가 스치는 걸 봤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K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팀장님, 저랑 티타임 한 번 하시죠?”(팀장님이 제게 딱 맞는 감투 하나 만들어주세요, 네?)

“응?”(앗!! 이건 동귀어진 하자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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