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선배는 전략가이다. 나아갈 때 물러서고, 물러설 때 나아감으로써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그의 무용담은 언제 들어도 새롭다. 총성 없는 전쟁터인 전략부서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그래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잘 아는 척하면서 비즈니스 전략 서비스를 팔아먹는 spreadsheet jockey와 같은 이들을 경멸한다. 용담호혈에 떨어지면 과감하게 범의 아가리에 대가리를 밀어 넣거나 역린 보기를 닭털처럼 볼 수 있어야지(알고 보면 호랑이가 치통을 앓고 있을 수도 있고, 역린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따지고 보면 간지러운 곳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비위를 살살 맞추거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기회를 보아 빠져나와야 한다는 식의 평면적인 어드바이스는 뭣도 모르는 이의 개소리라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개소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 손자의 현신을 눈앞에 두고도 계속 개소리만을 지껄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보게, 화상 군. 이번 프로젝트 투자 협상 잘 되어가나?" "그게... 현재 상대방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이번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에겐 생소한 분야라 조금 걱정도 됩니다..."
"옳거니, 생소하단 말이지? 그럼 이렇게 하게. 우리는 내용을 잘 모른다고 하고, 상대방에게 그걸 핑계로 양보를 요구하게." "저어... 만약에 제가 '우리가 잘 모른다'라고 고백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모르는 게 자랑입니까?'라고 하거나 '그럼 더 알아보고 오세요'라고 하지 않을까요? 회사 간 협상에 '의좋은 형제'처럼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할 까닭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며칠 전부터 초점 잃은 눈을 한 채 오늘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나를 바라보는 N 선배의 눈빛은 이렇게 한심한 친구가 어떻게 승진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백전불태의 고급 손자병법 강의를 펼쳤다.
"손자병법 제9편 '행군'에 보면 그런 말이 있네. '적군이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전비를 갖추는 것은 진격하려는 뜻이다. 적군이 강경하게 말하면서도 진격하려고 하는 것은 퇴각하려는 뜻이다.' 상대방도 전략에 능숙한 자이니 이러한 전략의 생리를 잘 알 것이고, 그래서 자네가 '제가 잘 몰라서요'라고 말하면 분명 그 자는 '아하, 이 친구는 준비가 착실히 되어있는 자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양보를 해 올 것이란 말일세.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아니, 그쪽 입장에서는 양보를 할만하면 양보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양보를 하지 않겠죠... 말씀하신 backward induction 방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추론해 보아도 상대방은 양보를 안 할 겁니다. 우리가 무지한 이상 그게 상대방의 서브게임 퍼펙트 내쉬균형이니까요..."
봉두난발을 한 서양 귀신과 같은 소리를 해대는 나를 보며 N 선배는 입맛을 다셨다. 나폴레옹이나 빌 게이츠도 손자병법을 끼고 살았다던데, 이 놈이 뭐라고 손자 말씀에 토를 다는 걸까?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친구가 하는 말이 꼭 틀린 얘기 같진 않다. N 선배는 입맛이 썼다.
"그래, 그건 그렇고... 투자규모는 어느 정도로 추산하고 있나?" "아, 네... 아직 투자한도에 여유는 있습니다. 또 이번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가 크니, 규정이 정한 한도 내에서 가능한 최대 금액을 투자할까 고민 중입니다."
"화상 군, 누차 얘기하지만, 규정에서 한도를 정해놓은 까닭은 한도까지 투자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네." "아, 그런가요? 그럼... 한도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한도는 100% 다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세."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 채우는 것이 적당할까요? 대략 90%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시는지요?"
도대체 상식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다. 물컵에 물을 따를 땐 넘치지 않게 알아서 따르면 되지, 물컵의 90%까지만 따르라는 법칙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나 또한 속으로 볼멘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형제를 형제라고 부르지 못하는 놈의 족보는 뭣에 쓰라고 둔 것이란 말이냐. 한도는 한도인 것이지, 한도의 한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도의 한도의 한도를 계속 따지다 보면 한도가 0이 되는 건 시간문제가 아닌가.)
"그건 투자의 성격, 리스크의 종류, 계약 당사자의 신용도, 포트폴리오 관리 등 다양한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책정하는 것이지, 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규정에서 정한 한도의 정의와 별반 다르지 않는데요... 그럼 한도만 적당히 지키면 된다는 거죠?"
N 선배는 또다시 입안이 깔깔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자병법에 이르길 장수가 용맹이 지나쳐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죽을 수 있고, 반드시 살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사로잡히게 되는데, 오늘 관상을 보이 하니 이 친구는 굳이 한도를 다 채우겠다고 과잉투자를 고집하다 장렬히 망할 상이다.
게다가...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막스 베버가 이르길 관료의 명예는 그의 상급자가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고수할 경우, 그 명령자의 책임을 떠맡아 이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듯이 성심을 다해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료가 이런 규율에 따르지 않거나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전체 국가기구는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도 하였다.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그런데 이 놈은 아까부터 꼬박꼬박 말대꾸다. 스스로 유능하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래 봤자 젖비린내 나는 이런 녀석에겐 사흘에 한 번 꼴로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 것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겠다.
"그래... 그런데, 화상 군은 승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아... 네, 동기들도 대부분 승진했으니까요... 선배님, 혹시 오늘 점심 뭐 드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