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날들 속에 살아있는 하루
이른 여름의 시작은 가장 몸이 즐거운 시간이다. 그 무렵 커다란 산 앞에 서는 것, 그 시간 깊은 계곡에 드는 것, 그즈음 숲길을 따라 걷는 것을 사랑한다. 나뭇잎의 변화는 멈추지 않는 바람이고, 시간을 타고 바람처럼 움직인다. 푸른 숲의 상쾌함은 그치지 않는 강물이고, 햇빛과 함께 강물처럼 흘러간다.
색은 생명이 없지만, 잎은 생명이 있다. 초록이 녹색이 색으로 존재하면 명사지만, 초록이 녹색이 잎 속에 살아가면 동사가 된다. 반짝이는 초록, 흔들리는 녹색, 시원한 그린, 상큼한 청록이 되어, 하늘로 땅으로 모든 곳으로 날아가고 흘러간다. 햇빛과 함께하면 반짝이고, 달빛 아래서는 흔들린다.
그 반짝임과 그 흔들림 앞에서 서면, 심장이 잠시 생각을 멈춘다. 머리로부터 오는 모든 신호를 차단하고, 머리가 내려보내는 모든 감정을 무시한다. 그 순간 그 어떤 것도 심장의 평화를 방해할 수 없다. 어쩌면 찰나 같은 아주 짧은 시간이 된다 해도, 동사로서의 초록은 심장에 유일한 안식이다.
그래서 이른 여름의 시작은 심장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피할 수 없는 일, 무엇을 한다 해도 도망갈 수 없는 연(緣), 그토록 노력했어도 바꿀 수 없었던 업(業). 그것들로부터 뜨거움에 지친 심장이, 잠시나마 안식을 꿈꿀 수 있는, 이른 여름은 그렇게 희망이 된다.
어느 날 그런 즐거움을 주는 나무, 희망이 되는 숲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되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 ‘하는 것’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나무가 되어 살 수 없으니, 나무처럼 살고 싶었다. 묵묵하게, 당당하게, 치열하게, 그리고 늠름한 사람 나무로 살고 싶었다. 생각은 즐거움을 가져왔고, 행동은 가혹함을 남겼다.
사람들 속에서 나무처럼 산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수없이 많은 겨울을 보내고서나 알게 됐다. 그것을 알고 나서 머리로 깨닫는 데 몇 해, 그것을 깨닫고 나서 마음으로 인정하는 데 또 몇 해. 그렇게 처절하게 살았던 시간은, 부질없는 시간이 되어, 인생의 낙엽처럼 과거에 쌓여 버렸다.
후회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무처럼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는 순간이 늘어났다. 그래도 여전히 나무처럼 살고, 아직도 그렇게 나무처럼 산다. 후회하는 것이나 다짐하는 것이나, 그것은 갈등일 뿐 행동이 아닌 까닭이다.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옳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다.
좋은 것은 변할 수 있지만 옳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 옳은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옳은 것이 ‘정의(正義)’라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의(便宜)’일 뿐이다. 나무는 정의를 알려주는 스승이고, 숲은 정의를 지켜보는 눈이다. 푸르고 넓은 잎사귀 하나 찾을 수 없는 겨울이지만, 이른 여름을 기다리며 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것도, 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는 심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