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날들 속에 살아있는 하루
몸의 존재를 순간마다 각성하게 된다.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더 그렇다. 메시지가 올 때마다, 전화가 올 때마다, 확인하고 깨닫고 한숨 짓는다. 행여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장갑이라고 끼고 있으면, 더욱 불편해진다. 콧등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는 그 단순한 행동조차, 마스크와 장갑이 방해하는 까닭이다.
근시라서 안경을 쓰는데, 노안까지 찾아오면, 정말 곤욕이다. 안경을 벗으면 먼 것이 안 보이고, 안경을 쓰면 가까운 것이 희미하다. 안경을 벗어 가까운 것을 볼 수 있을 때는 그래도 낫다. 언제부터인가는 안경을 벗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진짜 돋보기가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몹값이 몇 배나 비싼 다초점 렌즈로 안경을 만들어서 쓰던 날. 나는 그날 인정하고 깨닫고 받아들였다. 알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이해한다고 했지만 남의 일이었던 것,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험하지 못한 아둔함. 노안은 단순히 늙었다는 몸의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늙음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목공 작업을 하며 가구를 만드는데, 갑자기 눈에 뭔가를 씌운 것처럼 안 보였다. 어제는 보이던 것이, 오늘은 흐릿했다. 정말 그랬다. 그렇게 별안간에,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왔다. 공구를 들고 영문을 모르던 순간, 안경을 벗으니 보여야 할 것들이, 그때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아서 늙은 것이 아니라, 병마에 시달리다 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나이 되면 다들 노안 온다고 하는데, 오는 게 정상이 아니라 오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비정상이 너무 많으니, 그것을 정상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조금이라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보려 애쓰지만, 방법을 알아도 도리가 없다.
노안이 오는 것은, 갑자기 무서리가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냥 가을이 가나 보다 했는데, 느닷없이 무서리가 내리면, 조금 있어 겨울이 시작된다. 노안이 무서리처럼 찾아오고, 몸에도 겨울이 점점 깊어진다. 잎이 떨어져 바람에 날리듯,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늘어난다.
몸속으로 시간의 겨울이 잦아들 때, 추위에 혹사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하는데, 긍정적인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세상의 코드가 긍정이 아닌데, 생각을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가 있나?
유머를 잃으면 건강을 잃는다. 그리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부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본인이 직접 체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절대로 들어서지 말아야 할 샛길이다. 잘 못 들어와 길을 잃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서도 길을 찾을 수 없다.
유머는 그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한 친구다. 늦게 알아도 괜찮은 것이 있고, 빨리 알아도 늦은 감이 있는 것이 있다. 노안이 오기 전에, 그것을 만나기 전에, 그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살아있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주변에 개그를 유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