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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 Jun 19. 2020

wannabe

라이프 5

 백종원 아저씨는 착한 척을 하다 보니 그것에 근접한 사람이 되었다고 골목식당에서 말했다. 그러니 골목 사장님도 방긋방긋해야 된다는, 대충 그런 말. 정말 내가 바라는 인간상을 따라하기만 하면 그것에 가까워질 수 있는 걸까. 그것을 ‘가까워졌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 자아의 진정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변화하는 사람에겐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 과거의 업보와 현재의 선함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지 알 수 없고, 내가 위선이 곁들여진 일종의 수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자 자아정체성이 아주 조금 붕괴되는 느낌이 들었다.


*

 내가 좋아했던 그 친구는 조금 독특했다. 근데 사람은 원래 본인과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이 맞긴 한 것인지 그 당시의 나도 만만찮게 독특했다. 특히 애정적 관계에 미숙한 것에 있어서. (마치 지금은 아닌 척하고 있다.) 어쨌거나 동아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걔를 졸졸 따라다녔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자주 시도하며 일종의 어필을 했는데, 나는 그것이 전혀 티 나지 않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매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중간쯤부터는 티나도 어쩔 거냐, 그냥 내 맘이라는 식의 막무가내이기도 했다. 일방적인 그런 구애적 행동이 사람에 따라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내 경우에는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상대방 측의 과실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친구는 내가 본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나를 테스트한다는 명목 하에 본인의 무릎 위에도 앉혀보고 그랬다(고 본인이 직접 말했다). 이러쿵저러쿵 지지부진한 전개에 지친 나는 어느 날 고백을 해버렸고 놀랍지 않게도 차였다. 다만 내가 별로인 이유가 좀 별로였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너도 나도 동성애자이긴 하지만 내게 너는 이성애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사귈 수 없다는 것.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게이가 맞고 그것은 내 마음인데, 니가 뭔데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을 하는 건지. 매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조금 어려웠으나 무례한 발언임에는 확실했다. 다만 차인다는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느라 객관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나는 그저 응, 하고 넘어갔다는 허망한 전개. 친구들은 나 대신 그 친구를 마구 욕해주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아는 형이 그 친구를 꼬시려고 했다는 것. 아마 그때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원래 부자가 돈을 더 밝히는 법이었다. 둘이 동아리방에서 같이 영화를 보다가 어찌어찌 야릇한 분위기가 되었는데, 그 형은 뽀뽀해도 되냐며 내 짝사랑남에게 물었고 그 친구는 슬쩍 넘어갈 뻔했단다. 당시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하던 그 형은 앗, 하더니 실언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나의 눈치를 보았다. (상당히 뒤늦긴 했다.) 참으로 아무렇지 않던 나는 괜찮아요, 하곤 주위 친구들에게 그 형의 교양 미비와 상도덕 없음을 에피소드화하여 퍼뜨리고 다니는 것으로 죄를 사하였다는 이야기. 아마 주위 친구들은 수십 번 이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실 때마다 술안주로 나는 이 얘기를 꺼내곤 한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둔 게 아닌가 싶고.


 이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는 형의 부탁이 있었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조금 상세히 복기하려니 기억이 잘 안나는 부분도 있고 그랬다. 그러나 분명했던 것은 그때 나의 반응이 이상하리만치 쿨했다는 것. 괘씸할 법도 한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대체 왜 그렇게 쿨하게 넘어간 것인지 조금 이해가 안 가긴 했다. 지금에서야 짝사랑남에 대한 애정이 많이 식어버려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의 나는 내가 ‘쿨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

 직전 연애가 망해버렸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서로 마음에 대한 균형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연애적 감정에 일종의 진동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대충 서로 그래프가 맞아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겠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처음 감정 그대로 계속 좋을 수 있을까? (내가 상대방에게 쉽게 질린다는 ESFP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정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을 텐데, 그것에 방해받지 않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둘 다 비슷하게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는 얘기. 아무튼 그런 면에서 맞지 않는 것 같아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쉽게 헤어질 수 없었다. 불편한 감정을 꽤 오래 느꼈는데도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왜 사람들이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 망설이는지 알 것도 같았다.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털어놓자 누구는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너무 빠져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쿨하고 로맨틱하고 좋은 내가 되기를 추구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가끔은 내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 이상형이 할 법한 행동을 수행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친구가 걱정되어 연락을 했는가? ‘좋은 친구’가 할 법한 행동을 의무적으로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내 진심보다 과장된 것이 아닌지, 아니면 아예 그런 '진심'이라는 것이 애초에 내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내 머릿속을 나조차 알 수 없을 때, 통제력을 잃은 정신을 어떻게 제어할지 고민할 때마다 슬슬 짜증이 났다.


 약간 다행인 지점은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든다는 것. 당분간 연애는 하고 싶지 않고, 쿨해야 할 것에만 쿨하면서 성질도 부리고 있다. (이미 많이 망해봤기 때문에) 경험으로 체득한 방어기제 같기도 하다. 근데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해서는 안될 목표가 아닌가. 궁극적으로 생각해볼 때, 결국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게 쉬운 일이냐고. 이 정도면 유전적 문제를 따져야 할 수준이 아닌지, 또 책임은 우리 부모님께 돌려야 하는 건지. 엄마도 나이가 들수록 착해졌다더니, 시간이 해결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지. 자연스럽게 될 수 없다면 인위적으로 나를 그런 형상에 투영하는 것이 크게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았을 때 이불을 걷어차지 않을 정도의 행동을 통해서라면. 본인의 흠에 대한 자기 객관화는 잘하는 주제에, 하필 인생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이런 것들에만 객관화가 어려운 내가 참 이상한 존재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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