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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슈어 May 31. 2021

화가 나는 건지, 화를 내고 싶은 건지.

공감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ep3

세상에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출근길 지옥철도, 답답하고 유난스러운 팀장님도, 옆 팀 깐깐한 ㅇㅇ대리도. 온통 나를 열 받게 하는 것 투성이다. 난 가만있는데 왜 다들 날 괴롭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불평이 쌓인다. 행동과 말투에 짜증이 베어 나온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이렇게 이해력이 부족하냐고!"

그대로 두면 폭발할 것 같아 아무나 붙잡고 짜증을 터뜨린다. 짜증의 대상은 정해져 있지 않다. 무능력한 상사도 되었다가, 비협조적인 유관부서도 되었다가, 기어이 불합리한 조직체계와 불평등한 사회구조까지 건드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 맞아!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이해가 안 된다니까' 친구도 동의를 하는 것을 보니 역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것봐~나의 분노는 보편타당한 것이었다. 누구나 나 같은 상황에 처하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 그들 잘못이다!


마음은 한결 편한데 어째 익숙한 패턴이다. 이러나저러나 내 잘못은 없고 남 탓뿐인 대화의 모양새가 영 낯설지가 않다. 끙!

화를 내다보면 어쩐지 불합리한 구조의 희생양이 된 것만 같다. 억울함을 달래주려 친구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니까! 뭐 그런 놈이 다 있냐?' 나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도, 누군가에게 용서라도 받은 듯한 기분에 제법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그래, 내가 참아야지, 뭐 어쩌겠어...' 못 이기는 척 슬쩍 화를 풀어본다. 화가 풀리는 포인트가 왠지 수상쩍다. 날 화나게 하는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뭐 때문에 기분이 풀린 걸까? 세상 무엇보다도 알기 어려운 나의 시커먼 속을 들여다볼 차례이다.

화를 내는 동안 진짜 원했던 것은 아마도 내 잘못이 아니라는 ‘타인의 인정’이었을 것이다. 화가 나서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인정을 받기 위해 화를 낸 것이다. 다시 말해,  짜증과 분노는 내 잘못이 아님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뭐? 내가 분노를 연기한 거라고? 자연발생적인 감정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를 합리화하기 위해 동원된 연기라고? 그렇다. 애초에 화가 났다기보다 화를 의식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내가 지금 얼마나 억울한지, 얼마나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상대방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이쯤 되면 매소드 연기라고 할 수 있겠다.

며칠 전, 60대 택시기사를 실신할 때까지 폭행한 20대 청년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술에 취해 택시 안에 구토를 한 것을 기사가 나무랐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청년은 틀림없이 '분노 조절 장애'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아버지 뻘의 택시 기사를  화가 난다고  실신할 때까지 때릴 수가 있단 말인가.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택시기사가 마동석 같은 울퉁불퉁한 덩치였다면? 그래도 그 청년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난동을 피웠을까? 흠... 아니,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마동석 같은 택시기사에게도 덤볐다면 그건 정말 '조절 장애' 였겠지만, 그 청년은 아마 성공적으로 분노를 조절했을 것이다. 연신 사과를 하고, 적절한 배상까지 했을지도 모르지.


결국 분노라는 감정은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결과로써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청년은 왜 분노라는 감정을 선택했을까?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해서 이루고자 했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역시나 본인 잘못을 무마하기 위함이었겠지. 구토를 한 것은 잘못했지만 인정하긴 싫다. 사과하기도 싫다. 그러니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아본다. '그런데 아저씨 말투가 왜 그래요?' 아마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주제를 아저씨의 말투로 돌리고 분노를 동원하여 내가 당한 부당함이 얼마나 큰지를 표현한다. '내가 오죽했으면 화까지 냈겠냐고!' 분노가 클수록 내가 당한 부당함이 커지기라도 하는 양 더 크게 화를 키운다. 기어이 폭력까지 동원한다.

본인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분노와 폭력을 동원했던 청년의 심리가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음...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는데 완전히 인정하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의 연기력이 감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발가벗겨진 듯 민망하다. 최근 화가 났던 상황들을 떠올려본다. 아내에게, 동료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화를 냈던 상황들을 돌아본다. 화는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분노를 동원하여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니, 대부분 회피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노를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의지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짜증이 밀려올 때는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화를 동원하고 있는가. 혹시나 무언가로부터의 회피가 목적이라면 밀려왔던 화를 그대로 흘려보내기로 한다. 그 대신 나의 잘못을 마주한다. 그토록 감추고 싶고, 피하고 싶었던 나의 민낯은 무엇이었을까?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문제를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문제를 마주하지 않고 풀어내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풀어내지 못한 것들이 하나둘 쌓여 문제투성이의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짜증까지 가득한. 종종 드라마 같은 곳에 화가 덕지덕지한 고집스러운 할아버지 캐릭터가 등장하곤 하는데, 커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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