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발을 뻗고 TV로 '예스터데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TV 옆에 기대 있는 달력 만한 사진 액자에 눈이 갔다. 비틀스의 노래가 사라진(애초에 없었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비틀스를 기억하는 사람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한동안 아주 좋아하고 늘 듣다시피 하고 살았지만 또 한동안 잊히고 당연해진 거장들의 노래를 다른 가수의 목소리로 다시 듣게 해 주었다. 여기서 '다시'는 '새삼스럽게'란 감정도 포함한다. 익숙한데 새로운 느낌 같은, 노래는 구석구석 많은 기억들을 따라오게 했다. 거의 모든 취향의 대상들은 이렇게 한동안 잊혔다가 사소한 계기로 불현듯 눈앞에 다시 나타난다. 거기에 감각과 기억이 있다. 기억의 재료는 감각이고 감각의 안내자는 기억이다. 식어버린 애정도 세월이 지나고 어느 순간 애틋해지고 새로워지고 하는 변덕,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지나간 것들을 별 이유 없이 다시 보고 생각하게 되고 되돌려 받게 된다. 옛 연인을 뒤늦게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고 처음과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지고 하는 것처럼.
사진 앞에는 해바라기 꽃이 핀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 사진이 갑자기 새롭게, 혹은 '다시' 보였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서 그냥 거기 있던 것에 대한 느낌과 처음 보는 듯한 신선한 느낌 같은 것들이 뒤섞이며 어떤 반응을 일으켰다. 노랗게 핀 해바라기 화분도 사진의 일부 혹은 세계의 일부로서 내 감정에 개입했다. 꽃이 사진 안으로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할까?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모두 좋아 보이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게 그 사진이 다시 보이는 데 10년이 걸렸다. 무심해진 그 사진에 대한 느낌이 새삼스럽게 '좋다'는 반응으로 돌아올 때까지. 사람의 보는 눈이란 게 그런 모양이다. 눈이라기보다 그저 즉흥적인 느낌,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이나 취향의 변화 같은 것이다. '새삼스럽다'는 느낌은 언어를 벗어난 감정의 회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액자로 만들어진 지는 10년,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 만도 2-3년 됐을(집안의 사진 위치를 종종 바꾼다) 그 사진이 그동안 안 보였을 리는 없다. 십 수년 전에 찍었던 내 사진 중에 고르고 골라서 개인전에 쓴 사진들이 있다. 물론 내가 좋았으니 전시회에 까지 내걸었을 것이다. 그땐 내가 무슨 예술에 대한 욕구나 시각적 의미 같은 것에 정신 쓰고 살 만큼 한가하지도 성숙하지도 않았다. 그냥 좋다 싶어서 걸었다. 그중 몇 장은(놀랍게도 몇 장은 팔렸다)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고, 그중 정면에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그 사진은 그곳에 있음에도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다. 그냥 작은 소품 하나로 그 자리에 보일러 온도 조절기를 가려주며 기대져 있었던 것이다. 북유럽 어느 도시 뒷골목에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과 저 멀리 걸어가는 남녀의 뒷모습, 그리고 자전거 정도가 보이는 사진. 시일이 지나면서 그다지 흥미도 애정도 다시 불러일으키지 않는 그저 보기 좋았던 보통의 사진이었다. 지루한 것, 반복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습성이 있긴 했지만 , 그땐 사진 하는 마음도 순수해서 욕망이 있었다. 잘 찍고 싶은, 좋은 사진을 만들고 싶은 패기와 치기 사이를 오가는 열정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욕구인지 취향인지의 정점에 있었을 그런 사진이다. 지금의 언어로, 촌스럽다는 뜻도 있다. 그 사진과 그 골목길에서의 기억이 갑자기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순간이 비틀스 때문이었는지 영화 때문이었는지 해바라기 때문이었는지 그날의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그 모든 것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느낌 속에서 해바라기가 사진 안으로 들어가 길가에 핀 꽃처럼 보였는지 사진 속 햇빛이 해바라기 위로 비쳤는지 알 수 없다.
스톡홀름, 2009
오래전 찍힌 사진에서도 한참 시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이는 것들이 종종 있다. 누구들은 드물게 타고나기도 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각별한 눈이 있겠지만, 나는 일과 세월과 그동안 쌓인 우울이 합심해서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사진도 이제 보이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었던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보는 것이 인지의 단계로 승격된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것이 보이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느낌만으로 충분한데 그곳에 분명 어떤 질서나 관계(무질서 속에서도)가 있다는 인식. 그것을 언어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테두리나 윤곽, 그것을 눈으로 만지는 느낌 같은 것일 뿐, 그 본질을 규정하거나 가리키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10년 만에 찾아오기도 하고 몇 달 만에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사진도 그림도 늘 익숙하고 대수롭지 않아서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을 눈앞에 들어 올려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물이건 순간이건 사진은 그것을 테두리(frame)하고 인용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다. 비슷한 화법이지만 전혀 다른 말을 하거나, 전혀 다른 화법이지만 비슷한 말을 하는 그런 다양한 표현 말이다. 그런데 개인적 경험에서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사진, 액자까지 해서 걸어두었던 사진이 보이지 않았던 뭔가를 지금에서야 내놓는 기이한 현상이 둔해져 가는 머릿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분석하거나 질문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고 반기기로 마음먹었다. 나도 사진으로 관객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돋아나는 느낌인데 그것을 말로 하긴 여전히 어렵다. 감정을 촉발하는 계기는 도처에 있지만 그 인과관계를 규정할 수 없다. 사진과 영화 속 노래의 관계 중 말할 수 있는 게 그나마 있다면, 그건 소리도 형태도 없는 '다시'라는 부사다. 비틀스의 노래가 다시 들렸고, 사진도 다시 보였다는 것 정도다.
기싱(George Gissing, 영국 소설가)은 어느 날 해 질 무렵 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농가 앞에 의사의 2륜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모습과 불 켜진 2층 창문을 보고 갑자기 『 트리스트럼 샌디』 생각이 나서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20년간 펴보지 않았던 그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