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에서
놀랍도록 사진을 정확하게 찍는 이 아이에게 '넌 사진에 소질이 있으니 계속 사진을 찍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고민에 빠졌다. 어떤 식으로든 의미는 있겠지만 그것이 그의 감수성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경직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칭찬을 해주면 아이의 반응은 어떨까? 심드렁할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까? 말해버리면 사진이 흔들리고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사물을 대하지는 않을까? 어떤 일을 하든 사진은 때로 인생의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이미지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언어 하나를 알고 모르는 차이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이해할까? 고등학생은 칭찬에도 흔들릴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혹시나 이미 장래 희망이 있는데 갑자기 사진작가가 되겠다거나 사진학과로 진학하겠다며 진로를 바꿔버리면 어쩌나? 사진학과 진학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갑자기 바뀌는 진로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다. 영감의 계기가 되는 것은 괜찮지만 섣불리 인생 행로를 바꾸는 계기가 돼버리는 것도 위험한 일 아닌가? 심각하지 않지만 간단하지도 않은 좌고우면에 잠시 빠졌다.
여고생 영수는 사진을 배우지도 않았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사진은 그냥 찍는 거고 핸드폰으로 늘 찍고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는 일에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찍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 의식해 본 적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우리가 걷거나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할 일이 잘 없듯이, 사진도 걷고 먹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당연한 신체 활동으로 자리 잡고 인식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관심 없다는 아이가 사진 교실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을지도 궁금했지만 그건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사진이 안정되고 빈틈이 없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경지는 아니다. 그다음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수는 있다. 사진은 이미 정갈한 보여주기나 반듯한 기록의 역할과 별개로 표현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훨씬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세계로서 펼쳐지고 있다. 다만 그 아이의 시각적 표현 능력으로 세상을 직시하고 반듯하게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놀라웠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아이는 사진을 찍어본 적 없는 게 아니다. 또래 누구나 처럼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폰을 만지고 사진 찍고 놀았을 것이다. 다만 사진 또한 찍는다는 별도의 자각 없이 그냥 신체의 일부와 같아진 스마트폰을 다루는 여러 행위 중 하나일 뿐이었을 것이다. 사진이란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몸에 밴 언어, 즉 모국어처럼 자연스러운 생활의 과정에 포함된 당연한 것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람마다 언어 능력과 표현 방식이 제각각인 것처럼 스마트폰 카메라라도 뭐든 찍고 보고 하는 것이 남달랐을 수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딱히 원인을 말하기 어려워도 언어의 수준이 달리 드러나듯이 사진이라는 거의 선천적인 '말'도 그랬을 것이다.
사진을(카메라로는) 처음 찍어 본다는 이 아이의 사진들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서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기뻤다. 실체를 목격한 적 없던 천재성이란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사진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진 한 장 한 장이 허투루 찍히지 않았고, 대상(특히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당당하면서도 겸손했고 사진 앵글은 꽉 차 있었다. 어디까지나 관객의 시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진 자체가 어떻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로 넘을 수 없는 세계를 단정하고 오도하는 위험을 지닌다.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시각적 균형과 공간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찼다. 흔한 말로 구성이 거의 완벽했다고 말하면 설득력 있을는지. '천재'란, 정확한 개념을 지니지 않은 감탄사에 불과할 수 있지만, 적어도 사진 한다는 사람들로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아이의 시각에 대한 이야기라면 맥락이 좀 다르다. 초점도 수평도 맞을 만한 데는 맞았고 맞지 않을 만한 데는 맞지 않았다. 수십 년 사진을 찍어도 때로 자신 없고 불안한 뭔가가 사진에 남아 있다. 결정되지 못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어정쩡한 얼버무림 같은 것. 이건 숙련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일 수 있지만, 누구나 인생 앞에 불안하듯 사진 앞에서도 불안하다. 이 아이의 사진은 일단 다가서는 데 주저함이 없고 표현하는 데 과잉이 없고 찍힌 것들의 이유가 사진에서 드러난다. 사진을 상대적 우월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사진 해 본 사람들은 일반적 자세나 감각 정도는 사진에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베트남 다낭에 있었다. 4년째 강사로 참가하는 한 국제기관의 청소년 국제 사진교실. 영수는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한국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소나기가 그친 해변 모래밭에는 입을 벌리고 울고 있는 펭귄 모양의 쓰레기통들이 군데군데 서있었다. 펭귄들은 쓰레기통 본연의 역할을 위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늦은 오후 지평선 부근이 가늘게 붉어질 무렵 파란 하늘 위로 뭉게구름 덩어리들이 떠있었다. 그 사이로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짧은 무지개가 드러났다. 해변에는 아직 비옷을 벗지 않은 아이들과 벌써 벗어던진 아이들이 섞여 하늘과 무지개 사진을 찍어 대며 뛰어다녔고, 튜브를 타고 파도 위를 떠다니는 피서객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뒤섞여 노래처럼 들려왔다. 비옷을 벗지 않은 아이들이 펭귄을 닮았다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며칠 동안 마음속으로 되뇌며 준비한 말이란 것이 변변치 않았다. 변변치 않은 가운데 한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순간들은 찾아오니까 그 변변치 않음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것을 이야기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망설임만이 길었다.
바닷바람과 무지개와 아이들 웃음소리에 용기가 좀 났다. 아니, 마음이 풀어졌다. 촬영을 마치고 그 아이를 불렀다. "넌 느낄지 모르겠지만, 네겐 남다른 안목이 있어. 그 안목이 사진에 나타나. 안목이란 것은 네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자세가 드러난다는 거야. 넌 사진에 타고난 자질이 남달라. 공부하고 대학 가느라 바쁘겠지만 사진을 계속 찍어봐라. 뭐든 좋아. 카메라를 들고 네가 뭐든 찍고 표현하고 내보이는 일을 계속하면 좋겠어. 그건 네가 하나의 외국어를 잘하는 거에 못지않은 장점이 있을 거야. 사진작가가 되라는 게 아니야. 사진을 네 표현의 한 가지 언어로 늘 잊지 않고 살라는 거야..." 이런 말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는지 흘리는지 한 것 같다. 중간중간 "예"하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말을 맺지 못하고 있는데 저 뒤쪽에서 "영수야! 우리 사진 찍자"는 한 아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영수는 "응" 하고는 간다는 소리도 남기지 않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괜히 말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아이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고민스러운 일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뛰어가는 게 편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나의 그런 사려 깊은 충고 건 격려 건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넌 말솜씨(혹은 글솜씨)가 좋으니 계속 말도 하고 글도 써보라고 말하는 것이나 큰 차이 없지 않은가. 이미 당연해진 그 아이의 언어 표현을 두고 계속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메라라는 '제도적 장치'를 꾸준히 사용해서 사진을 찍어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기성세대(소위 꼰대)의 관념을 가르치려 드는 일이 아닐까. 이미 사진이라는 매체의 존재 이유에서부터 소비 방식까지 완전히 바뀌어버렸는데, 무슨 성현 말씀이라면서 엄숙 떠는 건 아닐까. 사진적 표현을 포함해서 사진을 찍고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모국어인 그들에게 이 언어 영토의 '이주민'인 우리가 뭔가를 가르치거나 계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니... 혼자 헛웃음을 흘리며 해변을 등지고 걸어 나가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바닥의 모래를 날렸다. 모래 바람을 피해 몸을 돌려서 보니 영수는 친구들과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고 있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며 눈을 찡긋하고 얼굴 위로 두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갖다 댔다. 고양이를 닮았다.
내 말에 대한 그 아이의 태도가 대수롭지 않아 보여서 나는 실망했을까, 다행이라 생각했을까? 그 감정을 나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깨달음이 있다면 그때 나도 그런 나이에 여전히 안목(혹은 취향이)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또 그 아이의 사진을 비롯해 모든 사진을 바라보는 시각도 자세도 달라져 있다. 오히려 그 아이의 사진이 안정된 제도권의 성취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이라면 편하게 칭찬하고 격려하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다시 말해 쓸 데 없는 고민이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천재라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최근의 제자들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습관을 들이라'고 말했더니 '다르게 보는 요령'을 물어왔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게 무슨 의미일까.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믿지 말라"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