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인간의 안목
첫눈에 반하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저 평범해서 눈에 띄지도 않다가 뒤늦게 좋아지는 사람도 있다. 눈에 띄는 특징 없던 사람도 계속 만나고 바라보게 되면서 조금씩 그만의 개성이 눈에 띄고 자주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것이 외모 건 말투 건 걸음걸이 건, 개별적 특징은 주변 누구와도 구분되는 그 만의 모습인데 그것이 볼수록 눈에 들어오고 좋아지는 것이다. 그 만의 고유한 도드라짐은 구체적 생명의 증거이면서 친숙한 개별성의 지표다. 그런 것들은 익숙해지기 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감각과 경험에는 처음부터 드러나는 것과 한 단계씩 건너가고 다가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 먼저 익숙해진 그다음에야 보이는 것들이다. 어찌 보면 익숙해진다는 것은 관심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일 수도 있다. 내일은 오늘 익숙해진 그다음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익숙해지면서 익숙해지지 않은 것들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다. 새로 발견하는 그다음의 모습이 많을수록 사람은 궁금증을 자아내고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볼수록 새롭다는 역설적 표현이 일리 있는 이유다. 익숙함과 새로움이 어우러져 한 사람에 대한 현재의 인상이 만들어진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인의 말(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은 읽을수록 깊고 함축적이다. 오래 보고 생각한 뒤에 말해진 짧은 글에 관계의 본질이 담겼다. 사실의 깊이는 그 길이와 관계 없다. 익숙해질 것들이 익숙해지고 보이는 것들의 앞뒤가 구분될 때쯤 그만의 특징과 개별성이 선명해질 것이다. 장점과 단점에 대한 판단 또한 아름다움처럼 주관적이기 때문에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특별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너도 그렇다'고 시인은 특별한 감정의 이유와 의미에 방점을 찍었다. '너도' 그렇다는 말은 '너야말로' 그렇다는 말의 일반형이라 생각한다. 구체적 대상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도 비슷하다. 균형 잡히지 않고 정돈되지 않고 선명하지 않고 흔들려서 어수선한 것들도 그렇다. 보이지 않던 것들도 반복해서 보고 시간 속에서 달라지는 차이를 발견하고 하다 보면 다른 차원의 질서 같은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숙하기 전에는 이미 좋다고 학습된 것들만 좋게 보이지만, 경험치가 쌓이면 쉽게 좋다고 말할 수 없던 것들도 점점 눈에 들어오고 호의를 갖게 되기도 한다. 그것이 왜 아름다운가를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게 되기도 한다. 사람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차이로서의 특징들이 눈에 띄고 어떤 경우 좋아지기도 하듯이 사물이나 세상의 보이는 여러 가지가 반드시 명백한(언어로 정돈된) 이유를 지닌 보편적 아름다움이 아니어도 나에게 만은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과학자들도 경험이나 학습과 기억 같은 추가적인 정보가 작동하면서 뇌의 더 깊은 영역에서 인식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안목이고 감각의 수준일 것이다. 노력이 아니라 감각, 학습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니다. 사람과 관계된 세상 대부분 일들이 그럴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익숙함이 하는 일은 양면적이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 자체가 형태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 일관적이지 않다. 익숙해지면서 지루해지는 것도 있고, 익숙해진 뒤에야 보이는 것도 있다. 자연스러운 느낌의 속성이다. 아름다움이건 결점이건 그것은 의지가 아니라 감각이 시간 차이를 두고 하는 일이다. 한눈에 아름다운 것은 쉽게 눈에 띄고 기억된다. 그리고 어떤 각별함은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아름다움은 낯익어짐에 의해 점점 그 빛이 바랜다"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썼다. 그것은 첫눈에 결정되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은 잘못이 없다. 반대로 별것 아니다 싶었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것이다. 흐릿하거나 작아서 눈에 띄지 않던 존재가 드러나고, 보이는 것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말을 하기도 한다. 언어가 사실이나 감정의 모든 면을 축약하지 못하므로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사실과의 관계를 존중하고 직시할 필요가 있다. 주관이기도 하지만 객관의 본질도 그렇다.
감각의 수준이 감동의 수준을 말하고 사람의 수준을 말한다. 나아가서 사회의 수준을 말한다. 선악과 미추의 구분이 단순하지 않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심지어 개인의 느낌은 아침저녁으로도 달라진다. 감동의 수준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입체적 시각에서 현상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성숙한다. 달콤한 위로나 직설적 격려와 같은 뻔하고 과용된 언어는 그 순간을 넘어 지속되기 어렵다. 말 한마디의 효험도 단계와 수준이 있다. 이를테면 경험과 식견에서 나오는 통찰과 언어의 깊이 같은 것이다. 반복되고 상투적인 것들에 지루해하는 본성은 새로운 감각을 필요로 하고 표현의 수준을 높이게 한다. 보이는 것들(사진이나 그림이나 영화 같은)도 그렇다. 말을 대신하고 말의 기능까지 감당하고 싶은 직설적 아름다움이나 감동은 즉물적이고 오래가기 어렵다. 그런 언어 감각이나 시각적 감동이 하는 역할도 분명 적지 않다. 그러나 한 번 경험한 미각의 수준처럼 보는 것에 대한 안목의 수준도 한 번 높은 곳에 올라서면 좀처럼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내려서기 어렵다. 왠지 기분 좋은 것들,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세계를 느끼고 반길 줄 아는 것은 발달한 감각의 결과다. 살아온 태도에 따라 모르는 사이 이미 성숙해버린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어느덧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는 식의 자각이 아니라, 이전에도 분명히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 드러나고 사물과 존재들의 관계나 의미 같은 것들이 보이는 자각이다. 마치 말을 걸어오듯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세상의 질서나 관계의 병치가 보이는 순간이다. 세상의 크고 작은 것들에 대한 부단한 관심과 사유,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여러 관점의 지각, 존재들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인식 같은 태도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어느 순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말을 통하지 않고 내 감각과 감정에 직접 닿게 되는 순간적 깨달음 같은 것이다. 세상 속의 독립된 복합적 존재로서 성숙해 간다는 표시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