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먼 곳과의 유대감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촬영한 사진 속 수십 억 광년 떨어진 은하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였다. 깊고 깊은 과거의 빛 덩어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수 십억 광 년 먼 우주 다른 은하의 어느 별 근처 어느 행성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어디건 누군가 살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둘 다 어렵다. 그리고 그곳 행성의 시간은 지금 여기의 체계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같거나 다른 차원의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체계의 시공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변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증거가 되는 의미로서의 시간은 어디든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그 소박한 기대를 깨부쉈다. 지구를 벗어난 우주에 잘 정돈된 지금이라는 개념은 없다고 말한다. 과거 다음, 미래가 오기 전의 현재라는 순차적 흐름의 개념도 무의미하다 한다.
물리학자들이 그 미약한 '지금'조차도 의미 없다고 한 것을 보고 그 아무것도 아닌 은밀한 상상을 버리자니 아쉬웠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에서 우리가 공감하는 지금이란 그저 우리가 사는 이 혹성 내의 어느 구석까지만 미치는 정도라고 했다. 머나먼 우주의 지금을 상상하는 일은 '음표 하나의 무게를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고 적었다. 지금이란, 그냥 사람들이 가 보았거나 노력하면 갈 수 있는 지구 어느 끄트머리까지만 해당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동시대의 혹은 동시의 일들을 생각 속에서 연관 짓고 상상으로 공감하고 하는 것들은 딱 거기 까지가 적당하다는 말이다.
체계 건 속도 건 별개의 세계에 속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그곳에서도 어떤 형태건 형식이건 지금이라 부를만한 순간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생각이란 것은 그 상상도 안 되는 먼 거리의, 여기에서 보기에는 무에 가까운 세계까지 뻗어 나가서, 그곳에도 지금이 있을 것이란 어떤 미약한 기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생각 혹은 감각이라 착각하는 상상 속에서의 물리적 거리는 그곳이 어딘지 가늠조차 안 되지만 한계를 모르는 공상은 저 우주 끄트머리까지 가끔 뻗어 갔다 오기도 한다. '지금'이라는 동시의 일들이나 존재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뻗쳐볼 만한 데가 머나먼 우주 까지면 안 된다는 것 또한 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는 그 자체가 사건인 그 먼 곳에서 여기와 공존하는 순간 말이다. 시간은 존재와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하이데거)는데, 그곳에도 어떤 형태건 존재가 있을 것이고 사건이 있을 테니 시간은 아무리 이곳과 개념이 달라도 있긴 할 것이므로 지금 또한 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것을 논증하고 주장할 근거는 없지만, 나는 누구나 평등한 상상이라는 무위의 행위로 그것을 유추하고 믿고 싶다. 물론 이런 생각에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을 것이고, 옛날부터 상상은 자유였다.
잘 정돈될 필요도 없고 지금이라는 개념도 필요 없지만 여기의 지금과 '동시라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겠는가' 하고 혼자 속으로 질문한다. 흘러가거나 뒤돌아가거나 휘몰아치거나 하는 시간 구조의 와중에 여기의 지금과 동시라는 순간 말이다. 나는 왜 굳이 확인되지도 않고 확인할 수도 없는 그 먼 곳의 지금에 집착하는 것일까? 지금이란 지속되는 현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시간 개념과 더불어 동일한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생각되기도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 뒤부터다. 우리를 덮고 있는 동시(同時)라는 큰 지붕 아래의 이질적 공간. 지금이라는 단어 개념은 흔한 말로 '큰 지붕 아래 함께 있다는' 공감의 유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상 만으로 느끼는 동질감, 같은 지금을 소비하는 유대라고 한다면 말이 될까?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라는 순간에 수 천만 광 년(몇 억 광 년이면 어떤가?) 먼 우주의 어느 공간에서 뭐든 일어나고 누구든 존재하고, 무슨 짓이든 하면서 살아간다는 상상 만으로도 그들과 우리는 동일 우주에 존재한다는 흐뭇한 공감 말이다. '이 조그만 지구 안에 지금 존재하는 수십 억 인류 중에서 고통받는 어느 개인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하면서 무에 가까운 우주 공간의 지금을 말하고 있는가?' 하고 허황됨을 지적한다면 반박할 근거가 없긴 하다. 그냥 지금이라는 순간에 대한 의식이 하나의 공간으로도 느껴진다는 상상에 대해 장황하게 생각해봤을 뿐이다. 누구든 밤하늘에 높이 뜬 달을 쳐다보며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도 발 디딘 그곳에서 지금 저 달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유대감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과 지금을 동시이면서 동일 공간이라는 지표로 인식한 것이다. 공감은 가끔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들거나 위선적으로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지금을 공유한다는 그 유대감 만으로도 사람은 영향받고 바뀔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빛과 시간은 있지만 지금 혹은 여기와의 동시는 우주에 까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까지’ 과학이 내게 말해주는 사실이다. 과학적 사실이란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다. 미래에는 뒤집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이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간이고 끊임없이 소멸하는 시간이다. 시간이 공간이 되는 경우는 간혹 있다. 기억 속에서, 타인의 기록이나 기억과 일치하는 나의 과거 시간은 동시라는 공감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때 우리는 각각의 그곳에서 그러고 있었구나' 하는 유대감, 각자의 시간으로 같은 사건을 경험한 타인에 대한 공감은 동시적이고 공간적이다. 지금이라는 커다란 지붕으로 덮인 큰 우주에 함께 있다는 안락한 공존감 정도라 하겠다. 상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고 보이지도 않아서 당장은 무의미하다 할 수 있는 무한 공간 저편에도 있을지 모를 지금, 딱 이 순간. 과학은 부정해도 심리적으로 덮고 있는 큰 지붕 아래의 막연한 유대감은 지금이라는 동시와 존재라는 사건을 기대하고 있다. 우주 모든 것들의 지금이라는 순간을 덮고 있는 큰 지붕, 그 아래 지금은 시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장소라는 느낌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