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의 바깥

사람의 얼굴을 말한다는 것

by 북태평양

에드문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에는 유럽 근대 철학자들의 작고 흐린 얼굴 사진이나 그림 들이 글 사이에 실려 있고, 윌슨은 이 사진 속 철학자들의 얼굴에 대해서도 글로 묘사해 놓았다. 그 묘사가 그들의 얼굴 생김새보다는 주관적 느낌으로 정리되는데, 그 표현이 당사자들의 개성을 추측할 수 있게 적나라하다. 느낌은 오는데 그렇다고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 문학적 그림 같은 것이다. 영국 사상가 로버트 오언의 얼굴을 두고 는 ‘고집스럽고 자존심이 강한 영국인의 코를 가졌지만 뺨 둘레까지 곧장 뻗어 나온 듯 보이는 움푹 팬 순진한 타원형의 두 눈과 달걀 모양의 갸름한 얼굴이 생각에 잠긴 온순한 큰 산토끼 같은 모습이다'라고 써 놓았다. 장난은 분명 아니므로 사람의 얼굴과 타인이 바라보는 느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봄직했다. 사람의 얼굴을 말할 때 얼굴의 바깥(인상이나 느낌)을 말함으로써 얼굴을 묘사하는 것은 실루엣을 보여주면서 실체를 상상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그의 마지막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상상력의 회로가 설치돼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서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얼굴은 그냥 얼굴일 뿐'이라고 썼다. 당대를 대표하는 냉소적 지식인도 상상되는 삶의 표상으로서 얼굴의 의미와 보이지 않는 여백에 상상으로 이야기를 써내는(그려내는) 것에 대해 한 말씀 남겼다. 나 또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사진 속 얼굴을 볼 때 경험으로 축적된 나름의 주관으로 그들의 삶을 짐작하기도 한다.


어른들은 얼굴이 그 사람의 이력서니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나도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누군가들에게는 나도 어른으로 보일 만한 겉모습이 되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이 또한 어른의 말로 들어줄지 꼰대의 말로 들을지는 모르겠다. 살아온 흔적, 살아온 자세 등의 과거들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느낌적으로, 과학적으로 일정 부분 근거를 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개인적 느낌만 보더라도 그렇다. 사회라는 곳에서 삼십 년 이상 뒹굴고 나니 이제 믿을 만한 사람, 못 믿을 놈, 얼굴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물론 목소리도 좀 듣고 말 몇 마디라도 주고받는다면 훨씬 실제에 가까운 인생의 생김새가 파악될 것이다. 당해 보고 겪어 보고 하니 알 만한 측면도 있다. 어쨌거나 지금 경험에 비추어 본 느낌과 실질적 인품이 거의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능수능란하게 글이나 말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언어적 묘사가 눈앞에 펼쳐진 실제처럼 느껴지고 만져지는 듯 실감 나는 경우도 있다. 눈앞에 보는 듯한 묘사가 사람의 얼굴에 대한 것이라면, 코는 몇 센티 높이로 눈과 눈 사이 넓이는 몇 센티고 눈꼬리는 미간을 기준으로 몇 도 올라갔고 하는 설명으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말의 그림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단편 「보트가 가는 곳」에 한 여인의 얼굴을 '눈이 커서 무척 유순한 인상이었고, 입술 옆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아지는 점이었지만, 막상 점을 달고 다니는 입장에서는 콤플렉스로 여길지도 모를 정도의 크기였다.'고 썼다. 생김새를 상세히 그려놓지는 않았지만, 글의 여백에 마음껏 내가 아는 얼굴과 상상하는 얼굴을 조합하고 그려볼 수 있개 배려했다. 배려를 염두에 두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을 배려한다), 글이 사람의 외모를 말하는 방식의 가장 높은 수준은 공간에 점 하나를 두고도 상상의 화폭을 가득 채우는 일이라 생각된다.


화분에서 나뭇잎 하나 떨어졌다. 나뭇잎일 뿐이지만 어떤 얼굴도 보였다.


얼굴을 말하기 위해서 이목구비의 높낮이나 크기 같은 정보를 말할 필요 없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늘 보고 사는 것이 사람의 얼굴이라 가장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기억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저 느낌이나 비유만을 말해도 되는 것은 늘 우리가 느끼고 비유하고 살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본 맨홀 뚜껑의 무늬에서도, 공중전화에서도, 구멍 난 나뭇잎에서도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본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얼굴의 추상들을 반기고 재미있어한다. 인간의 거의 모든 경험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얼굴이야말로 사람의 첫 번째 상징이자 구성요소다.


조르조 바사니의 소설 『금테 안경』에서 화자는 의사 파티가티 선생을 안경 낀 모습이 '전교 1등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보기 위해 이 책을 다시 뒤졌는데 그 문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다시 뒤지고 뒤져도 보이지 않아서 내 기억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이었을까? 로맹 가리였을까? 그런 식의 비유를 쓸 만한 작가가 누가 있을까?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이 더 꼬여서 아는 작가들의 글 속에 보였던 여러 얼굴들이 뒤섞였다. 결국 진원지 찾기를 포기했다. 오래전 메모장을 뒤져보니 거기도 『금테 안경』에서 본 걸로 '기억한다'고 적혀 있었다. 다만 안경을 '뿔테 안경'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때 이미 기억이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메모장에는 '그 사람의 얼굴을 글로 직접 보여줄 수 없지만 인상 혹은 우리가 갖게 될 성싶은 느낌에 미리 가서 기다리는 묘사'라고 적어놓았다. 무슨 말인지 애매하지만, '전교 1등'은 개별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시각적 상징이거나 은유일 것이다. 각자의 기억 속 여러 전교 1등 들과 결합한 어떤 인상을 떠올릴 것이다. 선명한 얼굴로 보이기도 할 것이고 분위기만 은연중에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생각 속에 떠올리는 것을 시각화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재미있겠다. 인공지능이 문장에 따라 그려주는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을 보여주는 기술 말이다. 인공지능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지만 사람의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 다양성 면에서 기계에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에드문드 윌슨이나 김중혁의 문장을 읽고 여러 사람들이 떠올리는 얼굴들을 그림으로 바꿔서 비교해 보면 참 재미있겠다. 각자 다른 개인들의 상상 속 그림들을 늘어놓고 비교해 보면 단 두 명도 같은 얼굴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 그림들끼리 또 어쩐지 닮아 보이는 점들이 있을 것이다. 기계가 능숙히 하는 일에 못지않게 사람들의 생각 속 이미지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나 식견과 깊은 관계가 있는 행위다. 보이는 만큼 보는 것이다. 여기서 보인다는 것은 평생 쌓이고 다듬어진 시각 경험과 지각과 감수성의 눈을 통한 것이다. 얼굴은 객관적 존재이지만 시간처럼 대부분의 경우 주관적으로 보이고 역할한다. 그것을 인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표정은 보여주는 사람에 의해 일시적으로 인위적으로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지만, 얼굴을 만드는 것은 평생에 걸쳐 하는 일이다. 드러나는 내 얼굴도 그렇고, 상상하는 타인의 얼굴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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