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 : 잔에 담긴 이야기

김철수씨 이야기, 98년 7542와 치아바타.

by 흔한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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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각오가 필요한 차가 있다. 보통은 오래된 보이차가 그렇다. 맛있게 우려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찻잎을 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약물의 체내 유효농도와 같다. 유효농도에 미치지 못하는 약이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듯, 아무리 작은 다관에 아무리 적은 물을 넣고 우려내더라도, 찻잎의 양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내가 마시고싶은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만큼의 차를 넣었다면, 이미 머그잔 한두개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의 차가 우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각오가 필요한가.


하루종일 다른 차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할 만큼 차배가 부를 각오를 하거나, 차를 함께 마셔줄 친구를 찾아야만 한다. 둘 중 어느쪽이 더 부담인가를 따져보자면 내 경우에는 후자쪽이 압도적으로 부담스럽다. 근래 유행하는 MBTI를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대문자 I다. 키오스크 바로 앞에서 곤란해하시는 어르신을 보고도 나서서 돕기 위해서는 1년치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나의 최선은 두 걸음 떨어져 침묵으로 응원하는 정도다. 그러니 오래된 보이차를 마셔야겠다는 결정은 쉽게 내려질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아침의 첫 곡은 허회경의 김철수씨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 결정의 책임은 유튜브뮤직이 지는것이 옳다. 질투가 되는 기쁨과 약점이 되는 슬픔 앞에서 98년 7542 (이하 98청병을) 마시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는 비약과 억지로 점철된 문장이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철수씨 이야기를 들으며 깨어난 아침에는 98청병을 마셔야 한다. 적어도 내게는 우주의 법칙과 다르지 않다.


98청병은 쌉쌀하고 시원하다. 입술과 혀에 닿는 감촉은 벨벳이나 크림처럼 보드랍고 따뜻하지만, 느껴지는 맛은 서늘할만큼 단호하게 딱 떨어진다. 오래된 원목테이블에 뺨을 부빌 때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안온한 나무향 너머로, 청량감이 느껴질만큼 건조한 고삽미가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 존경하는 은사님께 정확하게 혼이 나는 것 같은 맛이다. 어딘가 모르게 아리지만 후련하고, 뉘우침과 안도감이 동전처럼 등을 맞대고 찾아오는.


혹 맛이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거나, 세상에 그런 맛이 어디있느냐 항변하고픈 기분이 드는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티룸을 찾아주시라. 함께 김철수씨 이야기를 들으며 98청병을 나눌 수 있다면 내게 오히려 기쁜 일일 것이므로.


물처럼 계속 마실 수 있는 차가 있나 하면, 중간중간 티푸드로 환기를 해 주어야 하는 차가 있다. 98청병은 후자쪽이다. 아무리 존경하는 은사님이라 하더라도 계속해서 혼만 나면 불만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애초에 잘못을 저질러야 뉘우침이 따라오는 법 아니겠는가.


오늘 98청병에 곁들이는 다식은 특징이 없으면 없을 수록 좋겠다, 고 생각했다. 재기발랄하게 튀어오르는 즐거운 맛보다는, 담백하고 소박한 맛이 잘 어울릴 것이므로.


티룸의 냉장고를 두 번쯤 열었다 닫고, 냉동실을 30초쯤 열어두었을 때, 크라프트지로 둘둘 말아 찬장에 던져두었던 치아바타가 생각났다. 티코스에 낼 오픈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바게트를 주문하며, 배달 최소주문금액을 맞추기 위해 함께 주문했던 빵이었다. 하룻밤 방치되어 적당히 노화되고 마른 치아바타라면, 98청병과 좋은 짝꿍이 되어줄 것이었다.


투박하게 덤벙덤벙 썰어낸 치아바타에 올리브유를 쪼로록 둘러주고, 발사믹 식초도 살짝 올렸다. 굳어서 단단해진 치아바타를 질겅질겅 씹노라니 향긋한 올리브유의 감칠맛 너머로 간간하고 고소한 맛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씹으면 씹을수록 진해지는 탄수화물의 단 맛은 덤이다. 입 안을 뿌듯하게 채우는 만족감과, 빵을 집어먹은 다이어터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약간의 켕김이 풍선처럼 부풀었을 때. 지금이다. 98청병을 한모금 크게 머금는다.


입안을 가득 메웠던 모든 맛이 일순간 씻겨내려간다. 발사믹 식초의 새금함을 느낀 적 없는 것 처럼, 올리브유의 쌉쌀한 감칠맛을 경험조차 못해본 것 처럼, 오래 씹은 식사빵의 단맛은 글로도 접해본 적 없는 것 처럼.


보이차는 숙성한 차 창고에 따라서 맛이 크게 달라진다. 습창에서 숙성된 차는 농후한 맛이 나고, 건창에서 숙성된 차는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맛이 난다. 오늘 마신 98청병은 굳이 히스토리를 추적할 것도 없이 전형적인 건창의 맛이다. 98청병의 차탕을 혀끝으로 굴리며, 어느 건조한 보이차 창고에서 익어가고 있었을 98청병의 세월을 상상했다. 김철수씨 이야기를 만든 허회경은 1998년생이라고 한다. 한 아기가 태어나 웃고 울며 삶을 살아내다 이윽고 마음을 울리는 음악가가 될 만큼의 시간, 꼭 그만큼의 시간동안 98청병은 묵묵히 익어 온 것이다.


포트에서 팔팔 끓는 물을 자사호로 옮겨 따르기를 몇 차례. 차임벨은 여전히 울리지 않는다. 누구든 좋으니 저 문을 열고 들어와 주면 좋겠다. 한곡 반복으로 재생되는 허회경의 김철수씨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무한히 우러나고 있는 98청병을 나누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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