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 : 잔에 담긴 이야기

이윽고, 다시 햇차.

by 흔한 김씨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축축했다. 때 이르게 찾아온 더위에 땀이 잔뜩 흘렀던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담요를 꺼내려고 장롱을 뒤졌는데, 어느새 땅이 자글자글 끓는 여름이 되어 있었다. 기왕 잠이 깼으니 조금은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자 싶어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섰다. 산책이나 해볼까, 하고.


그런데, 택배가 와 있었다. 그것도 잔뜩. 산더미처럼. 발송지를 확인했다.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몇 주나 기다린 햇 녹차였다.


티룸에 출근하자마자 화병의 물을 갈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오늘 하루의 첫 곡을 골랐다. 산뜻한 설렘이 있으면서도, 더위를 씻어내는 청량감이 있고, 그래도 너무 소란하거나 들뜨지 않은 곡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참, 바라는 것도 많지. 스스로도 머쓱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려 햇차를 뜯는 날이니까. 플레이리스트를 하나하나 넘기며 아쉬워하다가 딱 맞는 곡을 찾았다.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 그것도 아오이 테지마가 부른 버전의.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 저녁은 티룸이 활기로 북적인다. 대만 국제 차 문화 교류 행사에 무대에 서는 아이들이 다례 연습을 하러 오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60개월, 70개월, 80개월의 인생은 척박한 초봄 땅을 뚫고 나오는 유채싹과 닮아 있다. 실수로 밟을까 두렵고, 돌아서면 한 마디씩 자라 있고, 자라는 속도가 제각각이라 높낮이도 맞지 않는다.


전혀 긴장하지 않는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 긴장해 종종대고 있노라면, 사회적으로 협의되지 않은 솔직함 (선생님 너무 지루해요)이라거나, 상상해 본 적도 없던 궁금증 (왜 화동이 제일 먼저 나가면 안 돼요?) 이라거나, 요구받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요청사항들 (장난이 치고 싶어요)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나는 거기서 허우적거리다가, 밤에는 결국 꿈도 꾸지 못하고 기절하듯 곤하게 잠들고 만다.


하지만 피곤함은 피곤함이고, 아이들의 공연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가능한 한 덜 지루하게, 한 번이라도 더 연습을 하게 만드는 게 지금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간식이다. 맛있는 차와 어울리는 다식을 실컷 먹은 아이들은 두어 번쯤 더 연습할 기운을 낸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연습 중간의 간식 시간이 정례화됐다.


오늘의 간식은 떡이었다. 콩앙금이 든 송편, 꿀떡, 유장과 조청을 곁들인 가래떡까지. 아이들은 한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떡을 탐닉했다. 탄수화물의 단맛은 애나 어른이나 똑같이 헤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이들 입에서 “목말라요” 소리가 하나둘 터져 나왔다. 지금이다. 충분히 식힌 물로 공들여 우려낸 햇녹차를 조심스레 따른다. 차는 분주히 찻잔에 담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시는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차가 고픈 아이들의 아우성에 맞춰 차를 내어 주느라 혼이 쏙 빠질 지경이다.


냉방이 켜져 있는데도, 아이들의 머리카락엔 땀이 맺혀 있다.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간식을 먹고, 또 뛰어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공연까지는 앞으로 단 2주 남짓 남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산만하고, 가끔 순서를 잊고, 걸음마다 기분이 쓰여 있다. 무대 위에서도 개구리가 되고 싶어 하고, 종이배를 접고 싶은 충동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무대를 망친다는 뜻은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해야 할 것을 하려 애쓰는 작은 인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사랑스러우니까. 햇녹차의 신선한 풋내가 기껍기만 한 것처럼.


연습을 마치고, 아이들을 하나하나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금요일에 보자. 인사하면 아이들은 장난스럽게 꾸벅, 인사하고 달려 나간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텅 빈 티룸에 앉아 다시 아오이 테지마의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를 재생시킨다. 바닥에 널브러진 방석과 죽비는 조금 있다가 치우기로 한다. 찻상에 그대로 놓여있는 다식접시도, 다식저도. 우선은 좋은 음악을 들으며 햇 녹차 한잔을 더 마시는 것이 우선이다. 아이들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진실이 하나 있다. 어른들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매번 갈등하고 있고, 사실 꽤 자주, 해야 하는 일이 패배하곤 한다는 것. 어쩔 수 없다. 하루의 피로는 길고, 아오이 테지마의 목소리는 너무 다정하고, 하필이면 햇 녹차가 도착했고, 올해의 녹차는 이다지도 끝내주게 맛있으니까.

이전 04화취향의 발견 : 잔에 담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