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 : 잔에 담긴 이야기

소란한 벡스코, 머쉬룸파이와 동정오룡

by 흔한 김씨


한달만에 키보드 앞에 앉았다. 먹고 마시고 만난 이야기를 적고자 브런치를 시작한 뒤로, 먹고 마시고 만나는 일은 쉬지 않았는데, 적는 일은 어쩌면 이렇게 어려웠는지 모른다. 화요일과 금요일의 업데이트라는 스스로의 계획을 저버렸다는 은근한 켕김 위로, 독자와의 약속을 지켜달라는 브런치 어플의 푸시알림이 회초리처럼 따갑게 울리는 나날이었다.


시작은 대만출장이었다. 대만의 국제차도절 무대에서 접빈다례(녹차를 대접하는 다례)와 선비다례(말차를 대접하는 다례)를 선보여야 했고, 다례에 앞서 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고, 꽃을 꽂는 어린이들을 오랜기간 훈련시켜야 했다. 훈련과 글쓰기는 병행할 수 있었지만, 출장과 글쓰기는 병행이 쉽지 않았다. 그렇다. 그럴듯한 핑계다.


그 이후 서울의 차문화대전에 참가하기 위해 일주일간 제주의 티룸을 비웠고, 여독이 풀리자마자 짐을 챙겨 부산 벡스코 커피쇼를 나온 참이다. 이번에도 꼭 일주일의 여정이다. 맞다. 이것 역시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하다. 다행히 바쁜 나날에서도 먹고 마시고 만나는 일은 쉬지 않았으니, 이 이야기는 향후에 풀 기회가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한달만에 굳이, 심지어 아직 출장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다시 키보드에 앉은 이유는, 첫째로 6월이 지나기 전 한 편이라도 글을 적어 올리고 싶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오늘 마셨던 동정오룡이 끝내주게 맛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은 또다시 맛이다.


나는 우롱차를 참 좋아한다. 우롱차는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 찬 미술관같은 차다. 탕색도 아주 옅은 노란 색을 띄는 것부터, 흑차에 가깝게 어두운 색을 띄는 것까지 다채롭고, 향도 산들바람 부는 언덕의 풀내음처럼 풋풋한 것부터, 위스키처럼 무겁고 복합적인 향을 띄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대만 우롱, 그 중에서도 동정오룡.


최근 인스타그램의 피드나 스레드, 차문화대전과 같이 차인이 많이 모이는 곳의 분위기를 보았을 때, 한동안 백차에 고여있던 트렌드가 청차류로 많이 이동한 느낌이다. 그리고 이제 막 우롱을 시작하려는 차인분들이 내게 하나같이 묻는 질문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롱은 무엇이냐는 것이 바로 그 질문이다.


답은 수월하다. 가장 좋아하는 차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어쩔 수 없이 말이 길어지지만, 가장 좋아하는 우롱을 묻는다면 담백하게 동정오룡을 꼽게 된다. 내가 느끼기에 동정오룡은 대만우롱의 가슴 한복판에 있는 차다. 가장 클래식하고, 가장 단단하다. 대만우롱이 가진 모든 매력이 동정오룡 안에 있다. 취향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다.


동정오룡을 맛보았을 때, 이보다 조금 더 섬세한 맛을 즐기고 싶다면 이산차를, 조금 더 화려한 맛을 즐기고 싶다면 아리산차를, 조금 더 청량한 맛을 즐기고싶다면 취록을 택하면 된다. 소박하고 무난하지만, 오래 곱씹을수록 밀도있고 단단한 맛이다.


다시 오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지금 부산 벡스코의 커피쇼에 나와 있다. 매일 네 종류의 냉침우롱을 준비하고, 두 종류의 밀크티를 준비해 부스를 꾸린다. 티룸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체로 차에 대한 이해가 있거나, 차를 마셔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방문한 분들이지만, 박람회장-특히 차가 메인이 아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와 다르다. 낯선 음료는 시음을 결정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반분의 호기심, 반분의 경계심을 가지고 시음할 차를 추천해달라 청하는 이들에게 가장 마음 편하게 권할 수 있는 차는 역시 동정오룡이다.


오늘은 동정오룡이 끝내주게 맛있었다.


동정오룡같이 무난하고 단단한 차는, 매일 마셔도 물리지 않고 늘상 맛있지만, 끝내주게 맛있다고 감탄하게 되는 일은 흔치 않다. 오늘은 그 흔치 않은 일이 발생한 날이다.


박람회가 열리는 벡스코는 무척 소란하고, 시간의 흐름이 고여있다. 계속 11시인가 하면, 어느새 15시가 되어있는 식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고, 시음객이 한바퀴 돌고 나간 박람회장에서, 나는 함께 참가한 업체의 머쉬룸파이 하나를 사들고 부스로 돌아왔다. 고소한 크림 맛, 치즈 맛, 그리고 입안 함뿍 들어차는 버터와 버섯의 맛까지. 목끝까지 꽉꽉 들어차는 만족감과 포만감 위로 차게 냉침해 둔 동정오룡을 크게 한모금 더했다. 배경음악처럼 늘 깔려있던 소음이 일순간 사라졌다. 청량한 첫맛이 피로를 씻어주는데에 이어, 살풋 로스팅된 고소한 맛이 단단하게 뒤를 받치고 섰다.


이 순간을 반드시 기록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람회 사흘차. 누적된 피로도 상당하고, 눈도 귀도 입도 지쳐있는 상황. 잔뜩 말라있던 화분에 함뿍 부어진 물처럼, 동정오룡이 씻어내린 것은 갈증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상황에서 같은 느낌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충격적인 경험을 누구와라도 공유하고싶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 아주 오랜기간이 지난 후에도, 소란하고 피로한 상황의 나는 오늘의 차게 냉침한 동정오룡을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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