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 : 잔에 담긴 이야기

바지런히 자라는 바질과 문산포종차

by 흔한 김씨



긴 출장 레이스를 끝내고 다시금 티룸으로 복귀했다. 이 한 문장을 써놓고 며칠을 삐쳐있었다. 대상도 없는 부아가 뱃속에서 슬그머니 치밀었다. 긴, 출장, 레이스. 이 세 개의 단어가 내 지난 한 달간의 고락을 뭉뚱그려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도리에 맞지 않다. 고 항변하고 싶으나, 사실 알고 있다. 진짜 멋진 어른들은 ‘긴 출장 레이스’ 같은 표현조차 쓰지 않는다. 그저, ‘잘 다녀왔습니다.’ 한마디로 갈음할 뿐. 007만 해도 그렇다. 총격전을 벌이고, 끔찍한 카체이싱을 거치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어도 ‘reporting for duty.’ 한마디로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응원하고, 그에게 박수를 치고, 그의 모험을 탐닉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니 나도 뱃속에서 치미는 부아일랑 꾹꾹 눌러 담아두고, 단 한 문장만을 남겨두기로 한다.

긴 출장 레이스를 끝내고 다시금 티룸으로 복귀했다.

나는 뚜벅이다. 도로주행을 하면서 깨달았다.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이 되어, 이런 시한폭탄을 도로에 풀어두는 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되겠다고. 앞으로의 내 일평생에 운전이란 없다고. 그리고 그 다짐을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 잘 지키면서 살아오고 있다. 서두가 길었다. 내가 직주근접을 넘어 직주 초근접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 침대와 티룸은 1분 거리에 있다. 위아래층이거든. 그래서 나는 티룸이 조금 더 앞으로 확장된 집처럼 느껴진다. 홈웨어를 입고 갈 수 없고, 감지 않은 머리로 갈 수 없지만, 그래도 크록스나 슬리퍼를 끌고 갈 수는 있는 범위.

토요일 밤늦게 제주에 돌아와 갈급한 수면을 취한 일요일 아침, 집을 보니 숨이 막혔다. 급하게 떠나느라 정돈하지 못한 냉장고 안 상황은 암담하고, 거실에는 풀다 만 짐이 프로메테우스의 바위처럼 나뒹굴었다. 언젠가는 내가 해결해야 할 내 몫의 업이지만, 지금은 싫었다. 아무튼 도망치고 싶었다. 해서 간신히 최소한의 의관정제만을 하고, 티룸으로 뛰쳐나왔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정리된 티룸에 도착해서야 살 것 같았다. 찻자리를 위한 기물이 모두 제 자리에 놓여 있고, 포트는 터치 한 번만으로 신선한 물을 길어 올려 끓이기 위해 완벽한 세팅이 되어 있다. 자주 마시는 우롱차들도 제품 번호에 따라 오름차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고, 실링팬이 천천히 돌았다. 그리고 화분들.

티룸 입구에는 두세 평 남짓한 화단이 있다. 장미와 아이비가 구조물을 타고 오르고, 달개비와 사랑초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돌단풍이 수줍게 손을 흔드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을 텃밭처럼 유용하는 화분이 몇 개 놓여있다. 빛이 모자라 해를 쬐러 나온 방울토마토와 가지, 방울토마토처럼 생겨서는 눈물 나게 매운 고추, 키 작은 바질들. 가만히 손을 뻗어 바질의 잎새를 쓰다듬었다. 조용히 고여있던 향이 보스스 일어났다. 자랄 만하면 베어다가 페스토를 만들고, 자랄 만하면 베어다가 샌드위치를 만들고, 다시 자랄 만하면 베어다가 음료를 만들어대어, 위로는 자라지 못하고 빽빽하게 옆으로만 자라는 가여운 바질들이 그새 한 뼘씩 키를 돋우고 있었다.

바질을 보니 비로소 수런대던 마음, 어디론가 자꾸 달음박질치고 싶던 마음이 제 자리를 찾고 가라앉았다.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동네 빵집에서 빵을 몇 조각 사다가, 크림치즈를 바르고 몇 장 따온 바질잎과 방울토마토를 올려 대충대충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소금을 조금 뿌릴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으로 몇 입 크게 베어 물어 식사를 해치우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차가 좋을까. 며칠간 마시지 못했던 차, 맑고 담백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을 수 있는 차. 하지만 우려내기는 수월한 차. 가볍고 산뜻해서 기분전환이 되지만, 마시다 보면 몸도 마음도 쉬게 해 주는 차. 찻장 앞에서 조금 고민하다가 문산포종차를 꺼냈다. 긴 결정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물이 딱 알맞게 끓었다.

가장 좋아하는 티팟에 찻잎을 계량해 넣고, 더운물을 부어 퍼지는 향을 맡으며 헛웃음이 조금 나오기는 했다. 남들 다 다니는 출장을 좀 다녀왔다고, 호들갑도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다. 끔찍하게 힘든 출장이었냐 하면, 사실 또 그렇지도 않다. 다녀오고 나서 체력이 고갈되어 그렇지 현장에서는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수다를 떠느라, 또 맛있는 음식을 먹느라 바빴다. 부산 출신 애인을 만나는 동안에도 먹어보지 못했던 부산의 국밥은 또 얼마나 얼큰하고 시원했던가. 몸은 고되어도 마음은 불편할 일 없는 출장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기특한 생각은 꼭 호들갑을 다 떤 다음에야 든다.

향이 가장 좋은 첫 우림은 그대로 따뜻하게 마신다.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차가 순식간에 입 안에 스며들어버리는 기분이다. 문산포종차가 매끈하게 목을 타 넘고 나서 입을 다물고 코로 길게 숨을 내쉰다. 목 안, 혀 아래부터 가벼운 달큼함이 차오른다. 신선하게 물을 머금은 꽃다발을 한 아름 품에 안은 것처럼, 난꽃향이 뿌듯하다. 언제 차를 따랐냐는 듯 비어버린 찻잔에 코를 박는다. 마신 적 없다고 항변하기엔 짙게 머무른 향이 너무 큰 증거다. 한참 향을 맡다가, 두 번째 포를 우려낸다. 부러 조금 더 진하게, 조금 더 길게 우려낸 차에 얼음을 잠방잠방 채워 넣는다. 분분하게 떠오르던 향이 얼음에 발목을 잡혀 차 안으로 깊게 가라앉는다. 이번에는 입을 크게 열고, 꿀꺽, 시원하게 들이켠다. 마치 맥주라도 마시는 것처럼.

소금을 뿌리지 않기를 잘했다. 한참 전, 샌드위치를 먹을 때 던졌던 질문에 뒤늦은 답이 따라붙는다. 식사가 담백하고 심플했던 만큼, 그 후의 문산포종차가 더욱 청량하게 느껴진다. 따뜻하게 마실 때의 문산포종차가 섬세하고 보드랍다면, 얼음을 넣어 급랭한 문상포종차는 훨씬 선이 굵다. 아주 또렷하고, 무엇보다 화려하다. 차게 얼어 둔해진 혀끝에도 쨍한 여름의 맛이 난다.

그렇다. 여름이다. 바질은 바지런히 새 잎을 내고, 찬 음료가 끌리고, 집 밖에 나가기가 싫어지는. 직주 초근접의 삶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바지런함은 더위를 피해 더 맛있는 차를 더 정성껏 우려내는 방향으로 발현될 것이므로. 아무튼 바질에게는 바질의 바지런함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바지런함이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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