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 ; 잔에 담긴 이야기

비 오는 오후의 목책철관음

by 흔한 김씨



하루 종일 티룸에 앉아있는 날이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제주는 여행지라는 것. 자주 오는 단골들을 제외하고, 워크인으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사람이 여행자다. 짐과 차림을 보고 어떤 여행을 즐기고 있는지 추측해 보는 재미가 있다.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찾는 차도 저마다 다르기에, 나름의 데이터베이스를 쌓고 있는 중이다.



오늘 방문한 여행자는 큰 배낭과 텀블러, 손이 쉽게 닿는 배낭 주머니에 꽂힌 접이식 우산과 물티슈. 바퀴가 흙물로 얼룩진 캐리어까지 들고 들어왔다. 매장 한편에 짐을 부려두고, Korean woo-jeon을 찾는다. 마침 햇차가 들어온 참이었다. 신이 나서 패키징을 개봉하고, 당신은 굉장히 lucky 하다고, 이게 올해의 첫 우전이라며 개완에 3g의 우전을 계량해 넣었다. 내친김에 비교시음도 한 번 해 보시라고, 세작도 함께 우렸다.



우전은 고요한 산사의 아침 첫 공기 같은 차다. 아주 그윽하고, 굉장히 부드럽고, 첫맛부터 끝 맛까지 잔잔하다. 그에 반해 세작은 맛이 조금 더 도탑고, 악센트가 있다. 가격은 곱절이나 차이가 나지만 맛은 어느 게 더 낫고 모자라고를 판별할 수 없이, 그냥 카테고리가 다른 느낌이다. 그러니 사실 매출을 위해서라면 비교시음을 권하지 않는 것이 옳다. 가장 정성껏, 정말 맛있는 우전을 한 잔 우려서 내면 대부분 그 맛과 향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이날 선물 받은 티니핑 선팩트를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또 이 세작이 얼마나 맛있는지, 본격적인 여름이 오면 차게 냉침한 세작을 마시는 도락이 얼마나 짜릿한지 주책맞게 자랑을 하고야 만다.



여행자는 잠시간 고민한 끝에 세작을 선택했다. 이어 또 다른 차를 맛볼 수 있느냐 물었다. 물론이라고, 어떤 차를 맛보고 싶냐고 물었을 때, 그는 조심스레 Taiwan Woolong을 이야기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동양의 차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은 물론 한국, 중국, 대만의 녹차와 우롱차를 두루 접하며 지내왔다고 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중국의 우롱차로, 그중에서도 도타운 맛이 나는, 로스팅된 우롱의 고소한 맛이 취향에 맞았는데, 대만의 우롱에 대해서는 마치 한국의 우전처럼 맑고 연하고 보드라운 차밖에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섬세한 맛이 더 고급이고, 더 우월한 취향이라는 이들이 주변에 더 많았다고.



우전과 세작을 두고 결국은 취향의 차이일 뿐이라는 내 말이 그의 어딘가를 건드렸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찻장에서 목책철관음을 꺼냈다.



사실 지금처럼 더운 계절에 맛있는 차는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여행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목책철관음은 굳이 따지자면 늦가을과 겨울에 어울리는 차니까. 하지만 밖에는 비가 쏟아붓듯 내리고, 티룸은 시원하게 냉방이 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개완에 3g의 목책철관음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동그랗게 말려있는 찻잎이 잠시간 떠올랐다가, 물을 머금고 개완 아래 바닥으로 찬찬히 가라앉았다. 차담을 멈추고 정성껏 차를 우려내는 사이, 창밖의 빗소리와 포트의 물 끓는 소리, 개완에서 우러난 차를 공도배에 옮겨 따르는 소리가 찻잎처럼 동글동글 굴러다녔다.



기꺼운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우러난 목책철관음을 맛보며 여행자는 함뿍 웃었다. 어리석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마치 위스키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이렇게 로스팅된 도타운 타이완 우롱을 처음 맛보았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그 즐거움에 손가락 끝까지 짜릿했다. 다른 사람의 취향을 들여다보고, 짐작했던 정답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에는 정말, 도파민이 돈다.



우리는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지금까지의 삶에서 꼽을 수 있는 단 한잔의 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지와 어울리는 차에 대해 이야기했다. 곧 폭우를 뚫고 고흥으로 가는 페리를 타야 한다는 그를 위해 목책철관음을 넉넉하게 우려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주었다. 폭우를 뚫고 가야 하고, 바람이 더 불면 페리를 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가장 취향에 맞는 단 한잔의 차를 맛있게 마실 수 있으니 이 날씨도 좋다는 무지막지한 긍정의 여행자가, 너무 고생스럽지 않게 고흥의 여자친구에게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년에 다시 보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티룸을 어떻게든 잘 운영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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