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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May 19. 2020

자꾸 다른 사람들 눈치를 봅니다

눈치를 보기 때문에 찾아오는 괴로움

다른 사람 눈치 보는 사람은 항상 괴롭다. 다른 사람 생각이 이런 지 저런 지 살피게 되고, 그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못한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못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눈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흔하게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것이 있다. 이런 경우 저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를 살핀다. 또 내 행동이 저 사람에게 감정적, 행동적으로 영향을 미쳐 피해나 보복을 유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떠올린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나온다. 내 행동이 어떤 결과를 유발할지에 대해 두려워하곤 한다.


작은 눈치부터 큰 눈치까지, 다른 사람을 이유로 자기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것이 바로 눈치다.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제약도 건다.


또는 상황의 눈치를 볼 수 있다. 내가 이 상황에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가, 이런 상황의 눈치는 주로 자기에게서 나온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렇게 해도 되는가 하고 살핀다. 크게 두 가지의 눈치에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친구의 눈치, 부모의 눈치, 형제자매, 직장동료, 상사, 교수, 선생, 제자, 가게 점원, 심지어는 그저 지나가던 생판 모르는 사람의 눈치까지 본다.



눈치가 왜 괴로움을 가져오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유로 자기 마음과 행동에 제약을 거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괴롭다. 하기 싫은데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괴롭다. 뜻대로 안 되면 괴로움이 찾아오는 법이다.

‘하고 싶다’와 ‘하지 못한다’ 과정의 중간에 다른 사람/상황을 둘 때, 그것을 눈치라고 한다.

이것이 눈치이며 더 생각해 보면 눈치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부모라도 몸으로 낳아 십수 년 바짝 붙어 기른 자식 속마음도 가늠 못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옆에 있는, 오늘 만난 사람이 자기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도 없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겠지’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내가 이 행동을 하면 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겠지’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은 맞지도 않는 생각일뿐더러, 그것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제약이 걸린다.


경험상 분명한 것들이 있다. 사람마다 건드리면 분명히 화를 내거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우울해지는 방아쇠가 있다. 그런 것들은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눈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만 빼면 제약을 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장하여 사회에는 예의가 있다. 이러한 예의는 지키면 되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다. 굳이 예의에 어긋나고, 상대방을 자극할 만한 것을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도 된다, 무례해도 되고, 상대방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은 가능하지 않다. 최소한의 것들만 지켜야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몰랐기 때문에 범하는 실수들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 사람에게 예민한 일, 친구의 비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언급하는 일, 그럴 때에는 사과를 하면 된다. 몰랐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안 하면 된다.


그러니까 눈치라는 것은 최소한이 아닌 것들이다. 또 이러한 것들은 자기의 짐작에서 나온다. 분명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자기가 만들어낸 착각에서 나온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도 없는데 안다고 착각하여 눈치를 본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눈치를 본다. 그렇다면 알면 되는 것은 내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아는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면 된다. 최소한의 것들을 모르겠다면 배우면 된다. 배우면서 조금 부딪히고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문제가 없다.


여기에 괴로움이 끼어들 틈이 없다.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기 싫다면 어떤 것들이 찾아오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찰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날 수 있고, 그 사람이 자기를 피할 수 있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싫다면 그것도 괴로움이다. 원인을 만들었으면 결과가 찾아오는 것이 세상 법칙이다. 그러한 원인을 만들었다면 결과가 찾아왔을 때 받아들이면 된다.



다음으로 눈치를 보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도 있다. ‘왜 나에게 친절하지 않지?’ ‘왜 나에게 이렇게 무례하지?’ 같은 생각들이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주길 바라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워진다. 심한 경우 피해의식이 생겨날 수도 있다. 나에게만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눈치를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친절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다. 그렇게 한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미워하고 속상해할 일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괴로운 것은 그 사람이 무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상황에서 괴롭기로 한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예의와 친절을 강요할 수 없다.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하고 괴로워진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바로 위에서는 최소한의 것과 예의를 지키면 된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은 지킬 필요가 없다니. 이것이 내로남불 아닌가. 그러나 나에게도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그랬을 때 찾아오는 결과가 나쁠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내가 무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무례하게 대했을 때, 이 경우 둘 다 기분이 나빠진다. 이렇게 서로 동시에 기분 나빠지는 바보짓을 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백화점 점원에게 매너 없이, 호텔 직원에게 막무가내로 대했대도 별 일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가 습관이 들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것들이 아무 상관없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결과가 좋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계속 그렇게 하면 된다. 자기를 위해서 어떤 게 더 이익이 될지 생각하면 된다. 상식적이라면 49와 51에서 51을 고르는 쪽이 확실히 이익이고, 무례와 예의 중에 어떤 것이 좋은 결과를 낳을지는 누구나 자기만의 판단이 있다. 나는 나를 위해 예의를 고르는 편이다. 무례를 범해도 딱히 기분이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면, 피해의식과 과도한 눈치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독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자기 머릿속으로 ‘사람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생각대로 해주지 않는다면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괴로움은 자기 자신 기분부터 나쁘게 만든다. 피해의식은 심한 경우이지만 조금 약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눈치를 보는 사람은 상대방이 기분이 좋았으면, 또는 나에게 기분 좋게 대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불쾌하지 않도록 눈치를 보는 것이다. 좋든 말든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다. 그러니까 나를 대했을 때 기분이 불쾌하지 않아야 한다고 정해 놓고 시작한다. 불쾌하고 말고는 그 사람 자유고, 그 사람이 자신의 습관에서 만들어내는 일이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대하지 않고, 어떻게 하려고도 하지 않으면 된다.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또 다른 눈치로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생각한다는 착각이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거라는 착각이다. 그러나 이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보지 않는다. 본다 해도 그런 생각을 하든 안 하든 그 사람 자유다. 그리고 생각을 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도 그 사람 자유다. 이 자유는 아무도 건들 수가 없다. 건들 수 없다는 말은 통제하거나 유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쁘게 차려입고 예쁜 말만 쓰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못나 보이고, 역겨울 수 있다. 유행에 잘 따르는 사람을 트렌디하고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고, 개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길에서 코를 판다고 더럽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다. (코딱지를 의자에 묻혀 놓는다면 그건 피해를 주기 때문에 좋지 않다.)


어쩔 수 없는 것에 신경 쓰고 매달리고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을 짐작하거나 계속 떠올린다면 그건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불편함이 생긴다면 자기 스스로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그냥 두는 쪽이 확실히 좋다.


마지막으로 보통 눈치는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일을 할 때’ 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든 말든 자기 마음대로다. 대신 했을 때 찾아오는 결과를 받아들이면 되고, 안 했을 때 찾아오는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보통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일을 할 때 눈치를 보니, 그렇게 하면 되고, 해서 찾아오는 결과가 ‘아 내가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구나’ 하면 된다. 그러면 아무 일이 없다. 원인과 결과가 일어남에 괴로움을 받을 필요도 없다. 모든 일이 원인과 결과다. 열심히 뛰면 숨이 찬다. 뛰었기 때문에 숨이 차는데, 숨이 차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그냥 뛰면 숨이 차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치를 보는 사람은 괴로울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최소한만 지키면 된다. 지키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결과가 그 결과였구나 알고 받아들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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