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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May 21. 2020

왜 사나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요

삶의 이유 찾기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아주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다. ‘사람은 왜 사는가’. 아마 이 질문은 인간이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전 인류에 걸쳐, 모든 인간 개체가 삶에 한 번은 생각해 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되었고, 그렇게 널리 퍼진 질문이지만 명쾌한 답이 없다.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누구는 윤회의 순환고리 속에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이라고, 누구는 외계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대답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증명할 수 없는 일이라면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누가 아는가. 미래에 누군가 증명을 할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실 수도 있고, 본인이 죽어서 직접 윤회를 경험할 수도 있고, 외계인이 바로 옆에서 말을 걸 수도 있다.


이 모든 생각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는 사고방식이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냥 잊고 사는 것이다. 평소에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라고 질문을 항상 떠올리고 사는 사람은 없다. 하루 두세 번, 밥시간이 되면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하루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꾸준히 ‘사람은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을 안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마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런 건 어렵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이라고, 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만드는 물꼬를 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잊고 살면 된다니, 글까지 쓰는데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일단 질문은 삶에 아무것도 아니다. 밥은 매일 떠오르고, 보고 싶던 친구도 떠오르고, 가지도 못하는 여행까지 떠올리는데 ‘왜 사는가’ 질문은 얼마나 떠올리는가. 그리고 떠올리지 않았을 때 얼마나 문제가 되었나. 사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떠올린다고 좋은 것도 없다. 왜 사는가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사실 있긴 하다. 스스로 철학적인 질문과 답을 고찰하는 대단한 사람이 된 양 고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멋지다고 생각해줄 수 있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모두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로 자신이 왜 사는지 찾아내는 사람도 있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라거나 인류를 위해 과학적인 공헌을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렇게 찾아낸 사람은 이를 위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간다. 돈, 명예, 권력, 성취 등을 얻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왜 사는가에 대한 답과 관련이 있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자신이 목적을 세워 이뤄나갈 뿐이지 그것이 삶의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제대로 된 질문이 맞냐는 것이다. 성인이라면, 고등학생만 되어도 누구나 안다. 사람은 부모님이 낳았고, 그래서 태어났다. 그렇게 자라서 지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왜’를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 언어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사람은 갖다 붙이면, 논리가 있어 보이면 그게 맞다고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태양이 왜 빛납니까? 태양을 구성하는 원자들간에 연쇄적인 핵반응이 일어나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다. 물은 왜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까? 중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하고, 분열하며 착상하고, 계속 분열하여 태아가 되어 모체가 출산했기 때문입니다.’ 밖에 없다. 그렇게 나온 것이 사람이다 ‘왜’를 묻는다면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 밖에 없다. 그러니까 질문의 문장과 문장이 담은 뉘앙스가 조금 엇나갔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간다. 그게 사람이다. 왜 사는가,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 아주 명쾌한 대답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어떤 파생되는 것도 없다. 태어났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있을 수 없다. 태어난 것은 산다의 이유가 될 뿐이다. 보통 괴로울 때 ‘왜 사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냥 태어나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괴로울 때 ‘왜 사는가’ 묻는 것은 ‘왜 지금 내가 괴로운가’ 하는 물음이다. 이때의 왜 사는지 질문은 무기력하거나 목적이 없거나 달성하기가 힘들 때 생기는 것이다.


왜 사느냐 묻는다면 태어났으니까 산다 하면 된다. 그리고 살면 된다. 살기 위해서 현대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꿈을 가질 수도 있고, 이루고 싶은 목적을 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루기 위해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삶이 괴로움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여기서 파생되는 것은 없다.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다. 내가 괴로운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내가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오히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더 괴로움을 만든다. 있지도 않은 이유를 자꾸 찾고 싶어하고, 있지도 않으니 찾을 수도 없으며, 그러면 뜻대로 안 돼서 더 괴로워진다. 할 필요 없는 질문에 자꾸 매달릴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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