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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May 27. 2020

다른 사람이 간섭하는 것이 너무 싫어요

간섭 받는 것이 싫을 때 간섭하지 않으면 해결된다

간섭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잘 없다. 간섭을 뜻하는 두 가지 말이 있다. ‘한국인의 정’과 ‘오지랖’이다. 두 가지 모두 간섭이지만 정반대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자기 주장이 약하거나, 결정 내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간섭 받을 때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할 때 누군가 옆에서 이렇다 저렇다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싫어한다.


간섭이 무엇인지부터 가볍게 생각해 본다. 바로 윗 문장에 적었듯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다. 또는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어줍잖은 충고/조언도 있다. 사실 간섭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간섭은 왜 짜증나는 걸까. 간섭이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짜증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안 들으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옆에서 간섭하는데 안 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유를 알면 괴롭지가 않다.


나는 남에게 충고나 조언을 하지 않는다. 정 원한다면, 3번 이상 요청한다면 한 마디 해주는데 그렇게 말을 해주면서도 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듣고 싶다고 하니 말해주는 내 의견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내 의견일 뿐이다. 이 조언을 듣고 그 사람이 그대로 하든 말든 그것은 그 사람 마음이다. 한 일주일 지나서 ‘그런 말을 해줬어?’ 라고 하더라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듣고 말고는 그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충고, 조언은 다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일이다. 그러니까 아주 조심해야 한다. 내 발자국이 그 사람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킬 수도 있고, 오염원이 될 수도 있다. 말의 힘은 이렇게 크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다는 것이 아니다. 굳이 발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아득바득 너의 세계에 발자국을 남기겠다며 조언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또 책임을 질 수도 없다. 내 조언을 따라서 그 사람이 괴로울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건 너의 선택이었잖아’밖에 없다. 조심스럽고 정확한 조언일수록 상대방이 따를 확률이 더 높다. 그러나 모든 일이 100%가 아니다. 그러니 나의 조언이 훗날 관계에 흠이 되는 씨앗이 될 수 있고, 원망과 실망 같은 괴로움을 만들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나서서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자기 세계에 함부로 발을 들이게 만드는 사람은 잘 없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철옹성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잘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침범이다. 그 사람의 철옹성을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자기를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 철옹성 덕분에 의지를 가지고, 자기를 믿고, 하나씩 해나갈 수 있다. 철옹성이 지나치게 두터운 사람은 자기를 자꾸만 감싸려 들고, 간섭을 무지하게 싫어한다. 철옹성이 조금 약한 사람은 너도나도 발을 들이는데 성벽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뿐이지, 사실은 싫어한다. 남의 간섭을 받으면서 별 신경 안 쓰던 사람들은 속으로 고민들을 안고 산다. 그러니까 내 간섭은 이렇게 통하지 않는데 자꾸만 덤벼서 서로에게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충고와 조언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충고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말대로 하리란 기대를 하지 않는 것
조언이 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일이라는 것

이것을 두고 간섭을 본다면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에게 간섭하는 것은 굳이 좋은 일이 아니다. 충고나 조언의 경우 다 상대방을 생각해서 하는 일이다. 어지간히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상대방 나쁘라고 간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간섭을 한다 해도 그것이 주는 피해는 자신이 감내할 과보로 돌아온다. 모든 일은 인과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과다. 무슨 하늘이 벌을 준다는 식은 아니다. 비유가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 이걸 따질 때는 아니다. 간섭은 별로 좋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 자기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함부로 발을 들이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억지로 발을 들이밀었다면 그것은 어떤 결과를 만든다. 발을 들이도록 허용했다 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들이지 않으면 곧장 거부감이 든다.


그렇다면 내 말의 위상은 명확해진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 말은 메뉴판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길거리에 널린 낙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낙엽을 보고 시상이 떠오르는 것처럼 하나의 자연물과 같다. 아무것도 아닌 잡초랑 같다. 내가 한 말은 내가 피워낸 잡초와 같다. 그러니까 내 간섭이 무용해졌다고 괜히 시무룩할 필요도 없고, 내 간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미워할 필요도 없다. 결정적으로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생각을 말로 한 다음 상대방이 그 말을 통해 뜻을 곧이곧대로, 왜곡이나 자기 해석 없이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그대로 해주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지위나 외부 압력을 이용하여 간섭한다면 아주 치졸한 일이다. 그 사람이 자기 간섭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한다. 노예로 만드는 셈이다. 노예로 만든다고 그 노예가 그대로 해주지도 않는다. 노예가 아닌 사람을 노예로 여겨 놓고, 왜 자기 간섭을 안 따르냐 하면 자기만 괴롭다.


요점은 내가 남에게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섭할 수도 없는데 간섭을 하려고 하니 괴로움이 저절로 만들어진다. 괴로움은 3가지다. 좋은 것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안 될 때, 싫은 것에서 떨어지고 싶은데 안 될 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 합치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롭다. 이 경우에 대입해 본다. 간섭하고 싶은데 간섭할 수 없으니 괴롭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어하니 괴로운 일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남에게 간섭하는 경우를 생각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이 나에게 간섭하는 경우에도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 여기까지만 알면 남이 나에게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너에게 간섭하지 않는데 너는 왜 나에게 간섭하는 것이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그러는 것이냐 하고 따지고 싫어하게 된다. 이것도 괴로움의 이유가 된다. 싫은 것에서 떨어지고 싶은데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간섭하지 않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데 (잘 안 되더라도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데) 상대방의 간섭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괴롭다. 내가 간섭해서 생기는 괴로움은 없어지는 것 같은데, 남이 간섭해서 생기는 괴로움은 더 커진다.


사실 내가 간섭해서 생기는 괴로움은 잘 못 알아챈다. 그래서 먼저 썼다. 남이 나에게 간섭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이게 사람이다. 원래 그렇다.


그렇다면 남이 나에게 간섭할 수 없으니 그러든 말든 알아서 하쇼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마음처럼 안 된다. 그래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너와 나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된다.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너에게 간섭할 수 없지만 너도 나에게 간섭할 수 없다. 받아들이든 말든 그건 내 선택이고, 거기에 외부적인 요인이 있어 따라야만 한다면 한 번 해주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생각이다.


모든 일은 관점을 달리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정과 오지랖처럼 말이다. 고마우면 정이고 귀찮으면 오지랖이다. 그런데 고맙고 귀찮고는 누가 정하느냐. 내가 정한다. 남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묶어 놓고 물고문 하면서 간섭 받으면 싫어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간섭 받아서 싫다면 스스로 노예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노예라는 단어가 거북하다면 끌려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나다. 간섭하는 사람이 아니다. 결정을 내가 내린다는 것을 알면 된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간섭하는 사람은 당신이 그 사람의 간섭대로 끌려가기를 바라지만, 따라가주거나 안 따라가거나 하는 것은 당신이 결정한다. 서로 분리되어 있다. 간섭을 받는다고 그 사람 생각대로 끌려갈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다.. 안 끌려갈 자유, 그 선택을 내릴 상황의 주인이 되는 것은 사람이라면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사람이 당연히 간섭 받으면 짜증나지’ 라면서 사람이 원래 간섭 받으면 짜증나는 게 아니라, 간섭을 간섭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그 사람의 간섭은 길가에 핀 잡초랑 같다. 잡초를 보고 예쁘네 하고 발걸음을 멈추거나 그냥 지나치거나 하는 것은 자기의 결정이다.


그래서 간섭은 없다. 내가 결정권자가 되면, 상황의 주인이 되면 간섭은 없다. 선택은 내가 내리기 때문이다. 끌려갈 이유가 전혀 없다. 3살배기 꼬맹이라면 모를까, 성인이라면, 청소년이라도 간섭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간섭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방에게 간섭할 수 없고, 상대방도 나에게 간섭할 수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읽는 사람에게 간섭할 생각이 없다.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저 내 생각을 꽃 피워 놓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예쁜 꽃을 피워놓는데 누군가 와서 예쁘다고 봐주고 꺾어간다면 그걸로 족하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간섭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 상황의 주인으로 그 사람의 간섭을 두는 것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간섭했기 때문에 노예처럼 된 게 아니라 간섭을 주인으로 모시기 때문에 노예가 된 것이다.


다 내가 만든 일이다. 내가 그렇기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간섭은 없다. 간섭이 나를 끌고가도록 내버려 둘 때 노예가 된다. 그렇다면 간섭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가. 듣고 그대로 하면 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면 된다. 안 해놓고 죄송합니다 하면 된다. 자존심이 상하는가. 죄송한 일이 아닌 것에 죄송하다 하면 거짓말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저 자기 생각이 맞는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하면 된다. 상대방이 짜증을 내거나 의기양양해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만들어낸 그 사람만의 괴로움이다. 너와 나는 분리되어 있다. 그 사람의 짜증과 의기양양에 휘둘릴 이유가 전혀 없다. 상대방의 감정에 내가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 역시 노예처럼 끌려가는 것이며, 분리되어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싸이코패스가 좋다는 말은 아니다. 공감도 할 수 있고, 덩달아 화가 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 생각대로 되면 감정이 아닌 것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그런 것이다. 남이 화낸다고 덩달아 화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분리 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감정이 내 감정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냥 보면 된다. 그렇구나 하고 보면 되는 것이다. 간섭하는 사람이 간섭을 할 때 말을 하는구나 하면 된다. 그러면 짜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거의 모든 간섭은 좋은 의도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나를 아끼니까 이렇게 말도 해주는구나 하면 된다. 나한테 호감이 있구나 하면 좋은 일이다. 간섭은 따라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고, 나중에 그냥 안 따라서 죄송합니다 하면 된다. 그래도 간섭하면 또 안 따르고 또 죄송합니다 해버리면 그만이다. 다만 저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있으니, 좋은 의도로 좋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간섭을 하려고 하는구나 하면 그만이다.


‘나는 남에게 간섭을 절대 하지 않는다!’라고 외쳐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이 자기에게 간섭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간섭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간섭하고 말고는 그 사람의 자유다. 내가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이 나에게 간섭하지 않을 이윤은 전혀 없다. 그건 그 사람 자유다. ‘나는 남에게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나에게 간섭하지 않도록 간섭을 하고 싶은 사람인 셈이다. 그러면 또 괴롭다. 상대방이 간섭하고 말고는 그 사람 마음인데, 그 사람 마음을 자기가 멋대로 정해버린다. 그러니 그 사람이 간섭했을 때, 자기가 건 제약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해서 괴로워진다.


남이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간섭이 괴롭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 사람 마음이다. 그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내가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섭을 하는 셈이다. 그렇지 않은 간섭은 애초에 괴롭지 않다. 그러니까 이런 간섭은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 그러면 괴롭지 않다. 그런 말을 하는구나, 상황의 주인은 나니까 내가 결정할 일이지, 그 간섭대로 안 해줄래 또는 해줄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간섭은 괴로울 이유가 전혀 없다. 너와 나는 분리되어 있고, 간섭할 수도 없다. 내가 남에게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간섭하지 않으면 남이 나에게 간섭하는 것도 괴롭지 않다. 그냥 바라보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간섭은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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