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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Dec 10. 2019

衣. 공간은 분수를 결정한다

곤도 마리에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은, 실은 정독한 적은 없는 책이다. “필요 없는 물건은 정리하고 갖고 있는 물건은 체계적으로 정리하라”는, 현명하고 상식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책을 굳이 사서 안 그래도 포화 상태인 책장에 책 한 권을 더하는 일이 그 책의 주제 의식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전자책을 찾아서 볼 만큼 열성적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곤도 마리에는 옷을 정리할 때는 가진 옷을 전부 꺼내 쌓아보라고 조언한다. 나는 사정상 20대 때부터 이사를 수시로 다니는 생활을 했는데, 그러다 보면 싫어도 1년에 한 번은 내가 가진 모든 옷들과 마주해야 했다. 그때마다 나의 감상은 자기 반성이나 주제 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대체 살면서 필요한 건 왜 이리 많나. 요구사항이 심플해야 심플 라이프를 할 게 아닌가. 사계절이 과하게 뚜렷한 나라에서는 혹서와 혹한, 그 중간 어디쯤에 해당하는 날씨, 미세먼지, 폭우, 폭설에 맞설 만한 착장을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호우 경보가 내리든 미세먼지가 침공하든 휴교나 휴업은 일절 허용되지 않는 나라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대충 입고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영역. 나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대충 입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곤도 마리에가 남긴 명언,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조언에도 나는 공감한 적이 없다. 애초에 설레지 않으면 왜 그 옷을 사겠는가. 어떻게 입겠는가. 다만 막상 사고 보니 가진 옷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몇 번 입어보니 불편하다거나 해서 손이 잘 가지 않게 된 옷들을 정리하는 일 정도는 한다. 강제로라도 옷이든 책이든 버려야 하는 경우라면 역시 이사다. 그럴 때는 옷을 한 벌 한 벌 대보면서 설레면 간직하고 설레지 않으면 그 옷에 이별을 고한 뒤 내놓는, 감성적 방식에 기댈 겨를이 없다. 오늘 안에 가진 옷의 20% 이상을 무조건 버려야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와일드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종류별로 옷을 나눈다 (예: 코트, 진, 셔츠, 니트, 티셔츠, 스커트, ...)

2. 같은 카테고리에 있는 옷 두 벌을 무작위로 고른다

3. 둘 중에 더 예쁘다거나 비싸다거나 실용적이라거나 해서 어쨌든 더 마음이 가는 쪽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린다

4 도저히 결정할 수 없을 때에는 3번의 옷 두 벌을 다른 옷 두 벌과 4각관계를 만들어서 그중 두 벌만 남긴다


이렇게 하면 논리적으로는 가진 옷의 50%도 정리할 수 있다. 마음이 약해져서 선뜻 결정할 수 없다면, “갖고 있을 주제도 안 되면서 이렇게 사질 말았어야지!”라고 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한다. 정서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고된 과정이지만, 하룻밤 사이에 새로 이사 갈 집의 수납 공간에 딱 맞도록 옷을 정리하는 데는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그러고 나서 반년이나 1년쯤 후에, 버렸던 옷을 입을 계절이 오면 그 옷에 얽힌 추억과 그 옷을 입었을 때 내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는지에 관한 (보정이 물씬 들어간)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 옷을 버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게 된다. 이때는 “갖고 있을 주제도 안 되면서...”의 약발이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최근 서울에 지어지는, 학생이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원룸을 보면 “어떻게 하면 이 층을 잘게 쪼개 월세를 한 푼이라도 더 받을 공간을 만들까”라는 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럴 돈만 있다면 대학가에 빌라를 세우는 게 최고의 노후 대책인 것 같다. 1인 가구에게는 직장인 밀집 지역 또는 대학가가 살기 편리한 까닭에 나도 그런 곳을 전전해 왔는데, 작년까지 살던 집은 20제곱미터 안에서 수면과 수납과 요리와 세탁과 목욕과 배설을 해결하게 되어 있었다. 사회초년생의 변변치 않은 예산으로는 16제곱미터 안에서 그걸 다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에어컨이며 공기청정기 등 계절별 필수 가전을 들여놓으면, 사계절 내내 적당히 멋을 부리는 걸 가능케 하면서도 신체를 쾌적한 상태로 유지해 줄 옷을 위한 공간 따위는 남지 않는다. 대학가 원룸의 수납 공간은 아예 “계절옷을 보관해줄 서울 외 지역의 부모님 댁”을 상정하고 만들어진다. 직장인을 타깃으로 하는 도시형 생활 주택도 마찬가지다.


설레지 않으면 버릴 것을 설파하는 곤도 식 신비주의는 서구인들에게 그렇게 잘 먹혔다 한다. 나라도 집에 베드룸, 드레스룸, 배쓰룸, 다이닝룸, 키친, 리빙룸, 게임룸, 가라지, 베이스먼트, ... 가 있으면 절로 물건이 쌓일 것 같다. 방이 다섯 개 넘는 집에 사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버리는 습관을 들이는 게 나을 것이다. 집 전체가 가로세로 5미터도 안 나오는 5평, 6평 집에 사는 사람에게 정리는 취미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궁핍한 학생 시절 고시원 방에 살던 내게 미니멀리즘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다.


물리적 공간은 그 안에 수용되는 물질의 부피도 제한하지만, 인간의 사고도 활동도 생활도 제한한다. 비좁은 공간에 부릴 수 있는 만큼의 생존템만 갖추고 살던 시절엔 그게 내게 허용된 분수라 여기고 살았다. 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왕복 네 걸음이면 다 서성거린 게 되는 방에서, 몽상과 심사숙고는 되다 말아서 자신이 낸 변변찮은 결과물만 덤으로 떠안고 지내야 했다. 형편이 나아지자 살림살이에도 제법 구색이 맞추어지고, 그에 따라 내 분수의 허용량도 약간 늘었다. 형편에 따라 분수가 달라진다면 분수에 맞는 옹색함을 추구할 게 아니라 형편을 피우자는 주의를 확립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학교에 적을 두었을 땐 더 열심히 더 잘 하라고 그렇게 부추기다가 막상 생활 전선에 뛰어드니 가져도 되는 것과 언감생심 마음에 품지도 말아야 할 것을 사회가 다 정해주는 현실에 신물이 난 탓도 (물론) (많이) 있다.


이제 나는 소위 투 룸 생활자다. 한 방은 잠자는 곳이고 한 방은 옷과 책을 보관하는 곳이다. 공간이 분리되니 각 방의 용도에 맞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고, 둘 공간이 없어 아끼는 물건과 생이별할 일도 없어서 좋다. 이 소유 양식이 내 분수에 맞는지 아닌지는 내 경제 감각과 제어 능력에 달려 있다. 아직까지 이 집에 내가 모르거나 안 쓰는 물건은 없다.


통제 불가능할 만큼 많은 물건을 쌓아두고 사는 삶은 불행하거나 최소한 불편할 것이다. 그 유일한 대안이 극단적 미니멀리스트 혹은 정리 빌런이 되는 것뿐인 사회에 사는 것도 나는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집’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인테리어 사진에 과몰입해 머리맡에 꽃병이나 램프 하나 둘 자리를 만든 것을 보고 글썽글썽 서글픈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5평 7평짜리 분수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 공간을 가꾸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더 넓은 집이지, 내 눈에 닿는 물건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다.


그래도 문명이 힘껏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자. 마타주에 맡긴 내 코트, 더 추워지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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