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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Oct 17. 2021

衣. 한 시트를 20년간 써야 하는 이유

옷 한 벌을 사는 데 저울질해 봐야 할 가치와 비용이 느는 시대의 고민

엘리자베스 L. 클라인의 [나는 왜 패스트 패션에 열광했는가]는 한때 H&M이니 FOREVER21이니 하는 SPA 브랜드의 옷을 강박적으로 사들이던 저자가 어떠한 계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몹쓸 쇼핑 습관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패스트 패션이 야기하는 국제적 환경 문제와 노동 문제를 고발하기에 이른 일종의 사회 비판서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20년 후에 면직물로 된 제품은 살 수 없게 된다!


내 취향과 기준은 아주 확고하다. 의복은 물론 생활 패브릭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당장 Egyptian Cotton Bedding을 구글에 검색했다. 늙으면 기력도 면역력도 후달릴 몸에 합성 섬유로 된 이불을 덮기는 싫었다. 침구를 500세트쯤 보고 보고 간신히 지갑 사정에 맞는 시트 한 장을 결제한 다음에야 나는 책으로 돌아갔다. 재밌고 유익한 책이었는데 특히 2주일 후 나일 강에 내리쬐는 볕 냄새가 그대로 스며 있는, 뽀송하고 빠닥빠닥한 이집트 면 시트를 깔고 잠잘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또 그 책을 읽고 나서 유니클로나 ZARA를 덜 사게 되기도 했다. ‘그래, 패스트 패션을 위한 옷은 소재도 바느질도 별로니까 이제 사지 말자.’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다음부터는 소재도 좋고 바느질도 한결 잘된, 약간 더 비싼 옷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평생 사거나 얻어 입은 옷을 합치면 족히 천 벌은 될 터이다.


하루 걸러 한 벌씩 옷을 사제끼는 버릇을 버린 건 비교적 최근의 일로, ‘새 옷은 정말 그만 사야겠다’라고 마음을 먹는 데 일조한 것은 가나에 있다는 옷이 흘러넘치는 강을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리터럴리 헌옷과 의류 폐기물로 넘쳐흐르는 강이다. 한국을 포함해 선진국에서 수출하는 헌옷들이 제3세계로 흘러들어 그 나라의 환경과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클라인의 책에서 ‘헌옷의 요정이 의류 수거함에 든 옷을 짠 하고 고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씨 좋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와 같은 취지의 문장을 읽고 나서부터 내가 헌옷 수거함 대신 일반 쓰레기봉투에 안 입는 옷들을 버리긴 했다. 사진을 본 다음에는 최소한 내가 버린 옷이 내가 사는 나라의 토양과 공기만 오염시키고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도 개과천선, 환골탈태해서 [그럴 돈으로 집이라도 한 채 사놨으면 지금쯤 부동산 부자가 되었을 텐데 나는 왜 옷을 천 벌씩이나 사제꼈는가] 같은 책이라도 한 권 썼다면 좋았을 텐데, 옷을 좋아하는 것을 포기는 못 했으므로 그럼 이제 새 옷 대신 빈티지나 중고 의류를 사기로 했다. 내가 사는 빈티지 옷 태반은 일본에서 온다. 이게 언제 만들어져 어떤 경로를 거쳐 나한테 팔리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이걸 생산하고 가공하고 유통하고 운반하는 데 치러지는 환경 비용이, 그냥 새 옷을 사는 것보다 더 드는지 덜 드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용품 하나를 사는 데 저울질해 봐야 할 가치와 비용이 점점 느는 시대다.


그런다고 또 소비를 안 하지는 않는다. 나는 타고나길 성실한 나머지 매번 가치 계산과 자기 반성이라는 귀찮은 과제를 미루지도 않고 꼬박꼬박 쇼핑을 한다. ‘이게 저거보단 낫겠지’ 하고, 마치 국회의원 선거 표를 던지듯 최악만은 면하고 차악을 택하자는 심정으로 쇼핑을 한다. 그래도 내 노동의 대가와 맞바꿀 만한 물건을 가지면 기쁘고 그것이 삶의 질과 격을 높여주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몇 번이고 세탁해 이제는 아주 부들부들하게 길이 든 이집트 면 시트에 누울 때 나는 여전히 가본 적도 없는 나일 강의 볕을 느끼고, 10여 년 후 이것은 좀처럼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이 되리라 생각하면 좀 우쭐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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