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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Oct 17. 2021

衣. 쾌적한 의생활을 위해 필요한 옷은 몇 벌인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사는 것의 명백한 단점

80년대에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다)에 다니기 시작한 나는 지금 와 생각하면 상당히 국가주의적인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일종의 표어로 활용되던 시기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것의 장점이 틀림없이 있기는 하다. 봄에는 꽃놀이, 여름에는 해수욕,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 구경을 즐길 수 있고 제철 과일도 그야말로 철마다 달라지니까. 하지만 나한테는 더 균형 잡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존재하며, 따라서 사계절이 뚜렷한 것에는 단점도 그만큼 있다는 걸 가르쳐줬어야 한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으면 그에 걸맞은 의복과 가전제품도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이상 기후로 인해 극단적인 추위나 더위도 출현하다 보니 서울은 영하 20도에서 영상 39도까지 고루 체험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도시가 되었다.


그 서울에서 1인 가구 세대주로서 쾌적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적당히 세련되게 살기 위해 도대체 옷은 몇 벌이나 필요한지 생각해봤다. 우선 그놈의 뚜렷한 사계절을 기준으로 나눠본다. 편의상 월별로 분리했다. ([ ] 안 항목은 호환 가능한 옷이다. 예를 들어 점퍼 대신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다.)


11-2월(겨울): 롱패딩, 코트, 울니트, 바지[스커트]

3-5월(봄): 점퍼[재킷/트렌치코트], 면니트, 긴팔 티셔츠, 셔츠[블라우스], 원피스

6-9월(여름): 반팔 티셔츠, 민소매 상의, 반바지[스커트], 원피스

10월(가을): 3-5월과 동일


즉 1년의 1/3은 겨울옷을, 1년의 1/3은 여름옷을 입어야 한다. 세탁을 고려해 각 종류별로 기본 2벌이 필요하다 치자.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 돌려 입을 수 있는 바지류는 중복으로 쳐도 총 13종으로 26벌은 있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26벌이 안 많은 것 같아도 자취방에 흔히 있는 폭 1미터까짜리 행거에 꽉 차게 걸 수 있는 양이다. 또 나 입을 옷은 직접 사서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26벌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도 이미 경험했을 터이다. 여름에는 땀도 흘리고 날이 습하니 상의는 저것보다는 더 필요하다. 에어컨 때문에 실내외 온도 차가 클 경우에 대비해 여름용 카디건도 한 벌쯤 있어야 한다. 8개월간 하의 두 벌로 버티는 게 싫다면 추가 하의를, 맨살에 니트를 못 입는 체질이면 히트텍이건 내복이면 이너웨어를 갖춰야 한다. 결과적으로 쾌적하게—너무 덥거나 춥지 않게, 위생적으로— 옷을 입으려면 최소 30벌이다.


여기에 속옷이나 방한용 잡화류(머플러, 장갑)를 더하면 이미 행거 하나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폭 1미터 행거에 폭 40센티미터짜리 3단 서랍 하나를 두고 옷을 갈아입는 데 필요한 공간이 1평 정도라면, 서울 거주자가 쾌적한 의생활을 누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대충 산출 가능하다. 2021년 9월 기준으로 서울 24구 아파트 값의 평당 평균 금액은 3,000만원을 가뿐히 상회한다. 아파트 청약에서 1인 가구는 대개 열외인 까닭에 대다수의 1인 가구 세대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다가구 주택에 산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3,000만원보다는 낮은 금액을 지불하고 있겠지만, 어때, 이래도 사계절이 뚜렷한 게 장점뿐인가? 나는 아직 사계절용 가전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았다. 


작년에 1인 가구 세대주 청년, 즉 비혼자를 대상으로 황송하게도 수도권 행복주택 신청 자격을 주길래 조건을 봤더니 집 크기가 16㎡였다. 1평은 3.306㎡이니 쾌적한 의생활을 하고 싶으면 집 면적의 1/5은 옷에 내줘야 된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화장실이나 주방처럼 필수 생활 공간을 제외하면 발 뻗고 잠자고 일할 공간이 나오기는 하나 싶었다. 핵가족 4인이 사는 공간을 4로 나눠서 1인이 살 공간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정책 설계자가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건 그렇고 30벌의 3배는 족히 되는 옷의 소유자로서, 쾌적한 의생활을 꿈꾸는 초보 1인 가구 세대주와 공유하고 싶은 팁은 다음과 같다.


1) 롱 패딩에 비용을 투자하기

가장 자주 입는 옷은 기능과 품질이 좋고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 것으로 구비해야 된다. 그리고 그 옷은 단연코 롱 패딩이다. 1년의 1/3이 겨울이라는 점,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북극 제트기류의 위상이 한반도에도 미치기 시작한 지금 롱 패딩은 코트를 대체할 수 있지만 코트는 롱 패딩을 대체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때 코트보다는 롱 패딩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 겉감은 튼튼하고 때 안 타는 재질, 속에 든 것은 뭐가 됐든 따뜻한 게 좋고 세탁할 걸 생각해 동물털 달린 것은 (귀찮으므로) 사지 말자.


2) 반팔 울 니트, 7부 소매, 실크로 된 옷은 (거의) 안 사기

어지간한 멋쟁이나 넉넉한 옷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1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하고 관리만 까다로운 이런 옷들은 심사숙고해서 사는 게 좋다. 물론 10년 전에는 나도 이런 옷들이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입지도 사지도 않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3) 섬유 향수, 주름 방지 스프레이 대신 스팀 다리미 쓰기

옷을 오래, 깔끔하게 입고 싶다면 합성 섬유보다는 천연 섬유 함유율이 높은 게 좋고, 보관이나 유지에도 각별히 신경 써야 된다. 이게 내 주머니 사정에도 환경에도 더 좋은 일이다. 인스타그램에서 파는 수상쩍은 주름 방지 스프레이, 섬유 향수 같은 걸로 섬유를 화학 반응에 노출시키지 말고 스팀 다리미 쓰는 걸 생활화해서 그때그때 다려 입고 제습제가 있는 옷장에 걸어두면 옷의 수명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수명이 짧은 옷은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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