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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Feb 07. 2021

冊.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은 사노 요코

사노 요코의 에세이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에는 제롬 K. 제롬의 [보트 위의 세 남자]가 언급된다.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을 재밌게 읽고 다음으로 읽은 게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였는데, 여기에도 제롬 K. 제롬이 나오기에 그다음은 선택의 여지 없이 [보트 위의 세 남자]와 [자전거를 탄 세 남자]를 읽었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아직까지도 나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은, 2차대전 시기로 파견된 시간여행자 V씨가 울적한 생활을 견디기 위해 작은 방 낡은 침대 위에서 탐정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댔다고 하는 부분이다. 그 책에서 추천된 작품들을 읽는 동안은 나도 지난한 전시 상황을 잊고 언젠가 이 신세를 면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이방인의 기분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나의 독서 취향은 그릇되게도 편향되어 19세기 영미권 고전과 미스터리 황금기 작품들, 현대 일본 소설과 에세이에 쏠려 있는데 첫 번째가 두 번째의 레퍼런스 역할을, 세 번째가 두 번째의 레퍼런스 역할을 했다. 좋아하는 작품에서 거론된 책은, 특히 그 책이 글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면 역시나 취향일 확률이 높다. 그렇게 추천되는 작품을 읽다 보면 결국에는 이전에 읽은 책에 이르는 뫼비우스의 띠(?)가 생기는데, 내가 게으른 나머지 그것을 어디 적어놓지 않아 이 자리에서 증명하기는 어렵다. 여튼 그런 식으로 읽어온 책들이 많다.


근래 읽고 있는 것은 우치다 햣켄의 [햣키엔 수필]로, 이 작가는 모리미 도미히코가 최근 국내에 소개된 에세이에서 언급했다. 다이쇼-쇼와 언저리의 얘기라 지금으로서는 이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햣켄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 에세이만으로는 역시 잘 모르겠네 싶기도 하다. 그러던 중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가 오랜만에 나와 반사적으로 샀는데, 햣켄, 도미히코, 하루키 세 작가의 에세이 중 하루키 작품이 제일 잘 읽혀서 다소 분했다. 하루키 에세이집은 나오는 대로 족족 읽어 그 문체에 익숙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좀... 이제는 읽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모리미 도미히코는 스스로 주장하는 대로 소박한 작가 본인과, 작품 세계의 그 점잔빼는 서술자 사이 어딘가에서 갈피를 못 잡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부터 특유의 맛이 떨어진다 싶더니 그 즈음 결혼을 하셨다고. 결혼 같은 대사건은 보통은 개인의 생활과 정서 상태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내 취향은 비혼 상태의 모리미 도미히코가 쓴 글에 가깝다.


올봄에 시간이 생겨서 국내에 나온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전부 읽었는데, 이제 와서는 어떤 얘기가 어떤 책에 나왔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역시 제일 처음에 읽었던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가 제일 재미있었다. 이 작가는 몇십 년에 걸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어서 내가 읽은 책들도 오랜 기간에 걸쳐 출간된 것이다. 나는 못 했지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출간 순으로 찾아 읽으시는 것도 좋겠다.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는 작가의 투병 생활 즈음에 쓰인 것으로, 내가 5년만 더 젊었어도 지금만큼 재미있게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린 것들은 이 재미를 몰라’라고 꼰대 행세를 하려는 게 아니라요, 20대에도 30대에도 40대에도 새로이 재밌게 읽을 책들이 있다는 뜻이다. 반면 시기를 놓쳐서 못 읽게 되는 책들도 있는데, 나한테는 해리 포터 시리즈와 [은하영웅전설]이 그렇다.


사노 요코 상이 추천한 책은 린위탕의 [생활의 발견]으로, 이건 또 내가 한 10년 후에나 읽어야 더 재밌지 않을까 싶은 에세이. 아직은 물욕도 번뇌도 끓어넘치고 있는지라 달관한 현자의 말은 조바심이 나서 차분히 귀 기울이지를 못한다.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이라면 무엇이든 열광하는 나는 AI의 책 추천 알고리즘도 물론 애용하고 있지만(이것은 비소설에 유용), 내가 산 책에서 언급된 책을 추천해주는 기능이 생기면 좋겠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면 다음은 [위대한 개츠비] 같은 식으로.


그밖에 내가 선호하는 책 추천 경로는 여성 작가들이 책에 관해 쓴 에세이를 읽는 것이다. [여주인공이 되는 법], [취미는 독서], [책이나 읽을걸] 같은 것들이 있겠네요. [책이나 읽을걸]도 근래 읽고 있는 것인데, ‘그럼 나도 책에 관한 글을 쓸 테야’라고 생각만 하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 이런 에세이들은 여기서 다루는 책들을 먼저 읽었을 때가 훨씬 더 재밌긴 하다.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다고!?” 하고, 남의 독서 경험에 깜짝 놀라는 경험도 해볼 수 있고. 성실한 독서가라면 필독서 리스트에 올릴 만한 작품들도 꽤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아서 어쩌다 책 많은 곳에 갈 때 ‘아, 맞다’ 하고 집어드는 식이다. 숙제처럼 읽을 책들을 리스트에 쌓아두는 것은 취향이 아니다. 그보다는 곳곳에 책을 쌓아두고 손 닿는 것부터 읽는 게 좋다. 그렇게 시작해서 읽다 만 책들이 또 집안 곳곳 어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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