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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Jul 25. 2022

커피 한 잔은 언제나 커피 한 잔 이상의 가치

불운과 악행을 전화위복 삼아 11,000원을 이꼈다

최근에 나는 작은 불운과 큰 악행을 나의 플러스(+) 기회로 탈바꿈시키는 시도를 했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캡슐 커피를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발단은 P모사가 피고용인을 상대로 저지른 부당행위였다. 전말을 파악하고 나는 더 이상 역 근처 베이커리에서 커피를 사지 않기로 했다. 큰 악행을 피하니 작은 불운이 닥쳐왔다. 역과 회사 사이에 가로놓인 도보 10분 남짓한 거리에 커피숍만 예닐곱 개인데 그중 내 예산 내에서 취향에 맞는 원두를 제공하는 곳이 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커피 애호가로서의 확고한 기준을 대폭 낮춰 카페인 중독자로서의 최소 조건만 적용했는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몇 년째 ‘우리집에서 가장 활용도 높은 가전 BEST 3’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일리 y3.3이 또다시 활약할 때였다.


일리 y3.3은 실로 훌륭히 제 역할을 수행 중이다. 귀찮아진 것은 나뿐이다. 얼음을 얼리고 텀블러를 씻는 데 전에 안 쓰던 시간을 쓰게 됐는데, 퇴근해서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비참한 기분이 들고 아침까지 내버려뒀다 하면 울적해진다. 나는 소위 ‘알파걸’ 1세대로 ‘여자는 집안일이나 하라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상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입받으며 자란 동시에, 어엿한 1인 가구 세대주로서 ‘자기가 먹은 것도 스스로 못 치우는 인간이 무엇을 제대로 해내겠는가’라는 가치관의 소유자인 까닭이다.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생활의 편의에 버릇을 망쳐도 단단히 망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울면서 전화하면 한달음에든 못 이긴 척이든 와서 그 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주위에 두지 않은 덕분에 여기서 더 인간으로서 타락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비참하거나 울적한 만큼 커피값이 줄기는 하였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면 이 동네 물가로는 못 해도 2,800원은 나가는데 캡슐 세 알은 그것보단 저렴하니 아마도 커피값을 아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가계부를 열어보고 다소 놀랐다. 커피값은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캡슐 커피는 경제적이니까 사 마셨다면 더블 샷을 넣었을 커피에 슬쩍 트리플 샷을 넣은 탓이 클 것이다… 아마도.


특정 세대, 특정 성별이 특정 커피 브랜드를 소비하는 현상이 전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안다. 사람마다 경제 관념과 주머니 사정이 다른데도 ‘커피 같은 기호 식품에는 월 얼마 이상을 지출하면 안 된다’는, 나만 모르는 어떤 기준이 존재하나 보다. 아무튼 나는 그 기준을 모르니까 부끄러움 없이 나의 월별 커피&차 지출 내역을 공개하겠다. 24시간마다 커피를 섭취하지 않으면 머리를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두통을 겪는 카페인 중독자로서 1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금, 토요일엔 (다음날이 쉬는 날이니까) 커피를 두 잔씩 마시고 주말에는 핸드드립을 직접 내리거나, 동네 커피숍에서 남이 만들어주는 커피를 산다.


 지출에는 커피& 도구, 커피 기기, 커피잔, 찻잔을  내역도  포함되어 있다. 지난달 커피값이 115,270, 본격적으로 캡슐 커피를  갖고 다니기 시작한  7월이니 11,000 정도가 절약되었다. (그래도 절약을 하기는 했다.) 2022 상반기엔 도대체 무엇을 했나? 일주일에  번씩 중국차를 마시러 가서 거의 매번  주전자를 주문하고 빈티지 차호(이것​) 중국차와 프리미엄 고쿠로 찻잎을 손에 넣었지…. 2021 4분기에는 연말 모임을 계획하느라 커피잔을  사들였다. 손님들이 무척 즐거워했으니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


커피값은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했지만 일회용품은 확실히 덜 쓰게 되었으니 환경에는 기여한 것이다—라고 하기에는, 버려지는 캡슐도 죄 플라스틱이다. 환경적으로 덜 유해한 방법은 핸드드립이나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려먹는 법 정도일 텐데, 도구 일습을 다 갖추었음에도 이쪽이 더 경제적인 옵션은 절대 아니다. 2021년 2분기와 2020년 하반기에 그래프가 유독 치솟은 달은 재택 근무를 한 달이었다—교통비를 아끼게 됐다는 명분으로 오만 가지 커피 원두를 사들여 핸드드립을 연습한 시기다. 그 덕분에 꽤 맛있는 커피를 내릴 줄 알게 됐으니 돈값은 한 셈이다. 그럼 바람직하게도 커피값에 4만원에서 6만원을 쓴 달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회의가 많아서 남이 사주는 커피를 많이 마셨다. 삶의 질은 그리 좋았다고 할 수 없는 시기다.


실은 위 지출 중 어느 것도 괜한 돈을 썼다고 여기지 않는다. 커피는 언제나 커피 한 잔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일에 집중을 못 하거나 먼 미래에 치매에 걸리는 것보다는 커피값에 월 20만원을 쓰는 게 낫지 않나. 두어 시간 창밖이나 멍하니 보며 사색할 여유를 5천 원에 살 수 있어서 다행 아닌가. 나는 식비를 아끼려 허리띠를 졸라맨 적은 있어도 커피값을 아끼는 게 지상 목표가 된 적은 없다. 비용보다는 맛과 준비 시간이 중요한데, 이제 여기에 환경적 영향이라는 기준도 추가됐다. 생각해봤는데 비용, 맛, 시간, 환경—네 가지 조건을 다 충족하는 커피를 마시려면 근로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대인이 돈을 아끼고 취향을 지키면서 환경까지 보호할 시간이 없는 게 문제다. 거기다 나만 모르는 암묵적 기준을 벗어나면 사치스럽다고, 환경오염의 주범이라고, 입맛이 비싼 척한다고(척하는 게 아니라 비싼 게 맛있는 걸 어쩌겠는가) 욕까지 먹는다. 그 와중에 누구는 코인을 채굴하고 먹방을 소비하고 가뭄의 시대에 물 쇼에 가고 아이돌 CD를 수백 장 사서 투기하는데, 조만간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로 커피 생산도 여의치 않아질 것이라 하니 내 생애에서 커피를 더 누리지 못하게 되기 이전에 힘 닿는 데까지 커피를 마시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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