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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주 Jun 08. 2024

[기고] 프롤로그 - 사량(思量)하는 해바라기에게

- 다른백년, <운주의 생명의 경계에게>

https://thetomorrow.cargo.site/1-23

사진 출처 : 효원 @hy0cean


  

 안녕, 해바라기야.

한두 달 전 제주도 해바라기 농장에서, 씨앗으로 많이 착각하는 네 열매를 열심히 쪼아먹는 새들을 봤어. 덕분에 너의 검은 열매머리가 듬성듬성 비었더라.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솔직히 웃기기도 했어. 이제 너는 머리를 한 곳으로 틀고 숙일 때구나. 한 해를 사는 너에게 가을은 어쩌면 애도의 기간이겠다. 다시 다른 씨앗으로 피어날 네가 내년 여름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또 활짝 피어 마주하기를 바라.     

 처음에 네 움직임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가 생각나.     

 ‘해바라기는 온열로 벌을 모으기 위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줄기를 움직입니다. 어린 개체일 땐 다음 날을 준비하기 위해 서쪽으로 돌아간 몸을 다시 동쪽으로 틀길 반복하며 자라나다가, 성체가 되어 꽃이 필 무렵엔 머리를 떨어트리기 전까지 가만히 동쪽을 향해 있습니다.’     

 아-. 생명의 움직임은 그저 주변 환경들에 수동적으로 감응한다기엔 너무나도 고유하구나. 스무살 무렵, 원하지 않았지만 머리를 억지로 기르고 본모습을 숨기기 급급했던 날들이 있었어. 이런 나에게 네 이야기는 반항심같이 피어오르는 어떤 위로였어. 해를 따라간다고만 오해받아 이름마저 해바라기인 네가, 사실 해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너의 시계를 따라갔다니. 그 뒤부터 늘 너를 내 맘 한구석에 피워두고 살았던 거 같아. 그동안 너의 얼굴을 빼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조금 알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웃긴 일일지 몰라. 나는 네가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나와 너무나도 다른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 어떤 생리 작용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지만, 너를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저 늘 있어. 네 움직임에 감탄해 닮아가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일종의 사랑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얘기해보고 싶어.     

 예전에 사랑의 어원이 궁금해 찾아본 적이 있어. 여러 어원들 중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사량’이란 말만 생각이 나네. 생각할 사(思)에 헤아릴 량(量). 나에겐 추상적인 것을 실체적인 양으로 가늠해보고, 느껴보고, 입장을 헤아리려 상상해본다는 실천의 말로 들려서 인상 깊었어.     

 있잖아, 나는 요즘 기후 활동, 인권 활동, 환경 활동 등등 다양한 운동들에 모두 질려있고 지쳐있었어. 사실 이런지 오래됐나 싶기도 해. 나 하나 바꾸는 데에도 시간과 품, 스스로에 대한 여유가 필요한데 거대한 시스템이 무조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에 늘 의문이 들고, 그렇다고 그냥 방관하자니 ‘이건 아닌데-’ 같은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일상에서 번아웃은 참 쉽게 오더라. 이런저런 문제를 다 맘속에 풀고 살기에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 늘 한계가 있는데, 예전엔 이걸 인정하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부정적인 시야에 많이 갇혀있었기도 했고. 지금은 내가 지구에 사는 작은 존재로서 내가 어느 곳에 갔을 때 행복하며 내가 가진 것을 잘 나눌 수 있을지 찾아보는 발걸음을 막 뗀 거 같아. 네 신체는 중금속과 방사능에 강하다고 하더라. 나도 내가 어떤 곳을 향해 가고 싶은지, 어떤 존재들과 어울리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리고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겁이 나도 계속 드러내면. 오염된 땅속 내 기질에 조금이라도 맞는 곳에서 불안과 동주하며 살 수 있겠지? 그러길 바라.     

내가 요즘 관심 있는 건 인간 외 생물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자각하는 일이야. 그 속에서 신체들을 향한 내 감정을 끊임없이 투사할 테지만, 어디까지 동질감을 느끼고 어디까지 경계를 지을지, 나의 입장을 한 올이라도 거두고 너의 입장에 서볼 때는 어떨지 찾아보고 신중히 고민해 가며 다가가고 싶어. 그 시작으로 내 주변의 존재에게 너에게처럼 편지를 쓰려해. 이 작업이 끝나면 너는 막 싹을 틔울 시기겠다. 너를 다시 볼 때쯤이면 나에게도 어떤 변화가 있길 바라며. 이만 줄여. 요즘 밤이 많이 서늘해졌어. 아침저녁으로 이슬이 많이 맺히더라. 곧 다가올 겨울 잘 버티길 바랄게.      



운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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