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잠들기 전 이불을 등 뒤로 길게 빼 두는 것을 좋아한다. 바스락거리고 가볍지만 부피감이 느껴지는 새하얀 이불은 머금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가라앉는다. 뒤척거리다 우연히 이불 쪽으로 돌아 누우면 이불에게 안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요즈음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잠에 들기 직전의 시간이다. 목욕을 한 뒤 습기를 머금은 채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내 방으로 들어온다. 짧게 일기를 쓰고, 내일의 일정을 정리하고, 머리맡에 놓인 전등을 켠 뒤 형광등을 끈다. 얕은 빛에 의존해서 로션을 바르고, 침대 옆에 슬리퍼를 벗어두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팔을 뻗어 전등을 끈다. 빛이 사라지기 전 내 시야에 마지막으로 걸리는 것이, 친구가 제주도에서 사다 준 기념품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이 꽂힌 책장 한 칸이라는 사실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사를 다닌 경험이 별로 없어서 지금 사는 집에서 인생의 절반이 훌쩍 넘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내 방은 느리게 변하는 듯 변하지 않았다.
어릴 적 내 방을 회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부모님께서 만들어주신 '간식 서랍' 한 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봉지 과자, 초콜릿, 비스킷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다양하게 서랍을 채워 주셨다. 밥보다 과자를 좋아하던 나는 양반집 곳간이 생긴 것처럼 든든했다.
용돈이 늘어나고 입맛이 달라져 간식 서랍을 스스로 채우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벽에 이것저것 붙이기 시작했다. 엽서를 좋아해서 어딘가 놀러 갈 때마다 조금씩 사서 모으는데, 그 엽서를 붙여두면 바라볼 때마다 그날의 시간과 함께한 사람들이 생각나서 좋았다. 엽서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칠판 하나를 사서 벽에 걸어둔 뒤 그 위에 자석으로 붙였다. 자주 교체되는 엽서들과는 달리 오래도록 벽에 매달려 있는 것들도 있었다. 아홉 살 때 그린 '고흐의 방' 모방작과 이모할머니가 바느질로 만들어주신 물고기 인형들. 오래도록 힘을 주는 편지와 사진, 포스터 같은 것들. 포스터 속 사람들은 처음엔 아이돌이었고 다음은 래퍼였고 마지막은 밴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변하는 취향에 발맞추어 내 방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했다.
방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느닷없이 부모님께서 내 방의 가구들을 바꿔주시겠다고 하셨고, 세월의 흔적에 나름의 애착을 느끼던 나는 멀쩡한데 왜 버리냐며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반항은 오래가지 못했고, 이전과 같이 온통 흰색이지만 디자인은 완전히 다른 가구들이 방에 들어섰다. 이전에 비해 간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간식 서랍은 사라졌고, 비워진 만큼의 자리를 향수와 꽃병이 차지했다.
짧게 반항했던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빠르게 새로운 방에 적응했다. 호텔 느낌의 새하얀 침구가 주는 차가운 깨끗함 위에 나를 살포시 얹어 두었다. 주변 사람들의 애정 표현 방식은 꽃다발을 건네는 쪽으로 변화했고, 나는 엽서를 모으는 대신 꽃을 물에 담가 두거나 말려서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펑펑 놀던 어릴 때와는 달리 나이를 먹을수록 방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별로 없는데, 얼마 전 주말에는 모처럼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언젠가 친구가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한 영화였다.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누웠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 때문에 베란다 방향으로 설치된 에어컨은 언제나 과하지 않게 시원했다. 새하얗고 바스락거리는 가벼운 이불속에 나를 올려두고 눈동자만을 자막에 발맞추어 움직였다.
러닝타임이 10분쯤 지났을 때 미리 배달시킨 아이스크림이 도착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쿠키 도우가 박혀 있는, 건강에는 좋지 않지만 어딘가 충만한 맛.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침대 밖으로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아이스크림과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드니 거울 속에 반사된 내가 보였다. 잠옷으로 입는 흰색 반팔 티셔츠와 체크무늬 반바지, 대충 쓸어 넘긴 머리에 안경을 쓰고 숟가락을 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앞 편의점도 못 갈 차림이었지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편안하고 무방비하게 평화로웠다. 거울 속에 함께 비친 내 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이 방은, 숨을 내쉬지 않는 것들 중 나 자신을 대변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나의 시간도 이 공간 안에서 흐르기를 바라고 아마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