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 속 장면들
초행길에는 언제나 긴장하게 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만한 심각한 길치인데, 그래도 덕분인지 사소한 능력은 하나 가지고 있다. 자신이 길치라고 주장하던 이들도 나와 함께 걷다 보면 위기감을 느끼고 어느새 능숙하게 나를 이끌고 가게 하는 능력이랄까.
물론 타고난 방향 감각이 없는 것도 맞지만, 경험 부족 탓도 조금은 있다고 슬쩍 핑계를 대 본다. 개인 운전기사가 있는 부잣집 딸은 아니지만, 길을 잃고서는 엉뚱한 곳에서 SOS를 보내기 일쑤인 외동딸인 덕분에 대중교통을 타 본 적이 별로 없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정류장에 남겨진 나를 데리러 오는 것보다 처음부터 승용차로 태워다주는 편이 당연히 수월했으리라.
그렇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지는 법 아닌가. 그래서인지 나는 지하철은 몰라도 버스를 타는 것은 꽤 좋아한다. 그 재미를 처음 느낀 건 열다섯 살 때인데, 그때 다니던 학원이 다른 동네에 있어서 늘 부모님이 통학을 도와주셨다. 딱 한 번 데리러 오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곤란해하신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때다 싶어 흔쾌히 버스를 타겠다고 말했다. 아주 추운 겨울날,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나는 웬일로 버스 정류장까지 헤매지 않고 단번에 도착했다. 버스 방향도 틀리지 않아서인지 그날따라 교통카드 인식음이 경쾌하게 들렸다. 맨 앞자리에 앉아 가방을 품에 안고서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바라봤다. 몇 가지 어두운 풍경들이 잡념 없이 지나가자 곧 한강 야경이 보였다.
한강 가까이에서 살면서도 어두운 시간의 한강이 그렇게나 예쁘다는 것은 그날 처음 알았다. 강물이 예뻤던 건지 그 위에 반짝이는 건물 불빛들이 예뻤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룩진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하염없이 바라봤던 기억만이 선명하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북적거림을 피곤해하면서도 대도시의 빌딩숲이 좋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공적인 형형색색의 점들이 눈이 시리도록 깜빡이던 몇 분 가량의 시간 때문에.
올해에는 버스를 타고 서울 끝부터 끝까지 이곳저곳 많은 곳을 가봤다. 버스 타는 게 취미인 사람처럼 마을버스도 타 보고 간선 버스도 타 보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고. 서울 토박이이면서도 버스를 타고 다니며 처음으로 서울 지리를 외웠다. 드디어 우리 집이 서울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길치라지만 스무 살이 되도록 이걸 몰랐다는 건 조금 심했던 것 같다)
지하철이 더 빠르고 효율적일 때가 많지만 인간적인 풍경은 버스 속에서 더 많이 담긴다. 이를테면 버스 기사님들끼리 창문 밖으로 주고받는 위트 있는 인사. 정신없이 게임을 하다가도 할머니께 바로 자리를 양보하는 중학생들.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할머님과, 너도 일어나라며 친구까지 일으켜 세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 누구의 카메라 렌즈에도 담기지 않을 순간이어서인지 오래 기억하고 싶어 진다.
며칠 전에는 오전부터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느라 너덜너덜한 상태로 버스를 탔다. 수십대의 버스가 오고 가는 중앙 차선에서 우리 집 근처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 겨우 자리에 앉았다. 집 밖에서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편인데, 익숙한 버스 번호가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없이 졸다 눈을 반쯤 뜨니 내 눈앞에서 휘적거리는 손짓이 보였다. 곧이어 시야에 들어온 버스는 어느덧 만석이었고, 내 옆에 서 계신 또래의 여성분이 창문을 열고 나에게 날아드는 모기를 대신 쫓아주고 계셨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너무나도 열성적으로 모기를 따라가는 그 움직임이 점점 선명해졌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드렸더니 끝끝내 모기를 내보내는 데 성공하고 재빨리 창문을 닫으며 뿌듯한 웃음을 지어주셨다. 잠결에 흘려보낸 야경보다 더 예쁘게 머릿속에 남을 순간이었다.
참, 버스를 자주 탄다고 해서 길치의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불과 이틀 전에도 버스를 반대로 타서 20분 거리를 50분이 걸려서야 도착했으니까. 이제는 경험 부족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비효율 속 여유의 시간들을 버스의 덜컹거림 속에서 꽤 자주 반복할 것 같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맨 앞자리에, 달이 찾아오는 시간에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을 그림 그리듯 머릿속에 붓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