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는 들어줬으면
“너같이 많이 읽는 애는 언젠가 쓰게 된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심시선 여사가 난정에게 건넸던 말이다. 열여덟 살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샤브샤브를 먹던 중 한 친구가 내 생일선물로 이 책을 건넸다. 처음 저 문장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코웃음을 쳤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만 해도 몇 권인데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되지 않지만, 책은 정말 많이 읽었다. 초등학생 때는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최소 스무 번씩은 읽었다. 주로 읽은 건 소설류였고 특히 고전 로맨스를 좋아했다. <오만과 편견>, <안나 카레니나>, <적과 흑>, <위대한 유산> 등등... 최근에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오랜만에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고전 로맨스는 별로 재미가 없다. 도대체 불륜 없이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건가?
소설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갈수록 시와 에세이가 더 빠른 속도로 내 책장을 채워가고 있다. 허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비해서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 많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상표, 어디선가 한 번쯤 봤을 법한 이야기, 나와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시선을 담아내는 사람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고 싶어 진다.
그래서 이따금씩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들에게 그물을 던진다. 그때그때 걸려오는 것들을 위해 펜에 잉크를 채운다.
낚싯대는 잡지 않는다. 글쓰기를 통해 무언가 실현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없다. 그냥 쓰고 싶으면 쓴다. 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나에게 글쓰기란 순전히 나를 위한 행동이지만 가끔 누군가가 내 글에 위안을 받는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렇다.
아무거나 쓰고 싶으면
아무 때나 쓰겠다는 말을 길게 하는 중이다.
조각을 모으면 언젠가 전체가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