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제주도 여행기 01

by 레톤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여 있던 고등학생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해진 수학여행 장소는 제주도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다. 여행은커녕 학교에도 나가기 힘든 상태였는 걸.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든가, 아무런 표정이 지어지지 않는 병에는 과연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어차피 나의 어른들은 솔직한 병명을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기에 대신 감기몸살 진단서를 내밀었다. A4 용지 위 푸른 잉크는 겨울 햇빛에 비추어보자 파리하게 빛났다.


병원에 가서 대충 몸이 으슬거린다고 말하자 의사 선생님은 음, 아직 목이 부은 것 같지는 않은데, 하면서도 너무나도 쉽게 감기약을 처방해 주셨다. 그 종이 한 장이 나에게 3일간의 자유를 선물했다. 꾀병으로 학교도 빠지고, 이러고 있으니까 나 되게 비행 청소년 같다. 그렇게 학교를 빠져봤자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시간을 죽이는 것이 고작이긴 했다. 정작 나의 표정과 언어와 행동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해내지 못하는데, 이 작은 종이의 말은 어쩜 그리 잘들 들어줄까. 정말 이상한 세상이야. 과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시간을 살 수 있을지, 삶을 연장할 수 있을지,


언제까지 이렇게 연명하며 살아야 할지.


그런 허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화가 왔다. 한창 제주도에서 웃음 짓고 있을 친구에게서.


“야, 너 자몽 향 좋아하던가? 내가 뭘 좀 사가려고 하는데... 아니다, 그냥 서프라이즈인 걸로 해. 끊는다. 내일 봐. “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대뜸 끝이 난 뜬금없는 전화에 나는 잠시 갸우뚱하다 뭐, 기념품이라도 사 오려나 보네,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친구는 늘 그랬다. 행복의 순간에 나를 까먹지 않았다. 맛있는 마카롱집을 발견했다며 보내온 사진에 장난식으로 한 입만 달라고 답장하자, 다음날 아이스팩으로 잔뜩 포장해 달려와주던 날처럼. 내 학창 시절 최고의 행운으로 남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학교 면학실 앞에서 만났다. 나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고 친구는 밝게 다가와 내 손에 작은 유리병 하나를 쥐여주었다. 투명한 하늘색이 가득 담긴 그 병에는 모래와 소라가 함께 뒤섞여 잘그락거리고 있었다. 제주의 바다를 한 스푼 떠온 것처럼.


장식품인가? 엄지와 검지 사이로 병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고맙다고 말하자 친구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방향제야. 네가 향수 좋아하니까 나름 고른다고 고른 건데, 한 번 마개 열고 향 맡아봐.


코르크 마개를 뽑아 조용히 코를 가져다 대자 옅은 자몽향이 밀려왔다. 그 뒤를 따라오는 약간의 짠내. 방향제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인위적이지 않은 은은한 향이었다. 친구가 쐬었을 해변가의 겨울 공기가 고스란히 담겨 온 것만 같았다.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각의 형태로.


사실 제주도에 가지 못한 것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어릴 때 가족 여행으로 이미 가 본 데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인상이 없었다. 단체 여행 특유의 붕 뜬 북적이는 분위기를 워낙 싫어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그 향을 맡고 처음으로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티백처럼 우려져 나왔다. 제주도를 한 번은 다시 가 봐야겠다. 직접 들이마시는 소금기는 아주 시원했을 것 같아.


내 코에는 괜찮았는데, 하고 내 얼굴을 살피는 친구에게 나는 아주 오랜만에 활짝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고마워. 자기 전에 매일 한 번씩 맡아야겠다. 그 말에 친구는 드디어 안심한 듯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도 같이 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고.


그 친구는 여전히 코팅된 네잎클로버처럼 내 삶에 끼워져 있고 나는 올해 여름, 그러니까 스물두 살의 한여름에 혼자서 일주일 정도 제주도에 머물기로 했다. 열아홉 살의 내가 가지 못했던 곳을 이제는 간다.


긴장감을 태운 캐리어를 끌고 서울을 떠나던 아침에는 비가 왔다. 비행이 끝나면 날씨가 어떠려나. 나는 꾸준히도 비를 싫어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하루쯤은 장대비에 갇혔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비바람 치는 제주의 밤 속에서 과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혼자서 만나는 천둥에게 조금은 겁먹을 것인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나는 아직도 나에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간단한 탑승 절차를 거친 후 창가 자리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9시 45분 출발, 11시 도착. 비행시간이 정말 짧네. 뒷좌석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나누고 있었는지 실상 비행시간은 한 시간도 안 되잖아, 하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간은 넘기지 않나?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던 중 비행기는 문을 닫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맞다, 날기 전에 땅 위를 달리는 시간이 있었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창 밖을 지켜보는 것도 조금 지겨워질 만큼 오래도록 발을 구르는 비행기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는 법을 연습하는 아기새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 귀엽지도 않은 고철 덩어리를 자꾸만 응원하게 되었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비행기는 없을까? 혹시라도 있다면 날개 위로 두 손을 얹어 꼭 잡아주고 싶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했던 게 높은 곳이야. 유령도 번개도 두려워해본 적 없는데, 낙하할 것만 같은 감각 앞에서는 늘 몸이 벌벌 떨렸어. 그런데 비행기를 탈 때는, 아니 비행기를 탈 때만 별로 무섭지 않더라. 내가 떨어지더라도 네가 온몸으로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다 네 덕분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게.


나는 게 무섭다면 달려. 같은 곳을 빙빙 맴돌아도 괜찮아. 다만 달리다가 지칠 때쯤 슬며시 한 발만 떼어 봐. 너는 이미 나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몸이 한결 가벼워질 거야.


분명 추락하지 않고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뒷좌석에서 난다- 난다-! 하는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렸고 몸속이 붕 뜨는 기분을 아주 짧게 느꼈다. 평생을 고통받아 온 항공 중이염이 그날은 희한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시작이 좋네. 창문에 몸을 기대니 날개가 보여서 어쩐지 비행기의 심장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좌석 번호를 기억해 놔야겠다. 음악도 듣고 책도 읽는 사이 마구 비를 뿌려대던 구름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아주 깨끗한 파란 하늘을 보며 졸다가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비행기는 무너지지 않은 채 내려앉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시간 만에 시야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