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기 02
‘HELLO JEJU’
비행기에서 내린 뒤, 내 손에 남은 건 검은색 숄더백과 상처투성이의 작은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기숙사에 들고 다녀 낡을 대로 낡은 회색 캐리어. 주변에서는 쓸 만큼 썼으니 새 걸 사지 그러냐고 한 마디씩 했지만, 나는 여행 내내 손에 익은 달그락 거림이 못내 반가웠다. 데리고 오길 잘했다니까.
평소 서울에서도 혼자 워낙 이곳저곳 잘 돌아다니는 편이라 6일간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점이 무섭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공항 밖 야자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저 마음속 보라색 풍선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설렘의 여운을 오래 즐기지는 못한 채 나는 곧이어 네이버 지도를 초 단위로 새로고침했다. 제주 버스의 배차간격이 극악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온 터. 그러니까 3분 뒤에 오는 버스를 놓치면 26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 황급히 걸음을 옮긴 덕에 나는 무사히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제주도 버스는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구나. 이마저도 새롭고 즐거워 눈을 크게 뜬 채, 긴장한 얼굴로 버스에 캐리어부터 태웠다. 캐리어를 들고 타도 괜찮은지 수도 없이 검색해 봤지만 사람마다 대답이 갈려서 손에 땀이 날 것만 같았다. 숙소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버스를 못 타면 택시라도 타야 되고…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지는 굳이 상상해보고 싶지 않았다. 겁이 워낙 많아서 삼만 오천 원이라는 숫자를 이미 확인해 둔 상태이긴 했다. 다행히도 기사님은 태연하게 안녕하세요- 발 조심하세요- 하고 인사해 주실 뿐이었다.
이른 낮인데도 버스는 만석이었고 나는 대충 아무 기둥이나 붙잡고 섰다.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쥐어야 하니 정차할 때마다 균형을 잡기가 영 힘들긴 했다. 양옆으로 사정없이 휘청거리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 한 분이 노약자석을 양보해 주겠다며 일어나실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저 곧 내려요! 아무리 그래도 어르신의 자리를 빼앗는 파렴치한이 될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발가락 끝에 힘을 주고 20여분을 버텼다. 그렇게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이솝(Aesop) 제주였다.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향수 매장이라면 누군가는 의아해하려나. 재작년부터 사고 싶어서 벼르던 향이 있기도 했고, 마침 북 익스체인지 주간과 여행 기간이 겹치기도 했다. 다 읽은 책을 가지고 가면 이솝 측에서 고른 새 책으로 바꾸어주는 행사였다. 과연 갈색 크래프트 종이 속에 어떤 책이 싸여 있을지, 기대감을 품고 어제 저녁 내 책장에서도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향수를 좋아한 지는 꽤 오래되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미니어처까지 합친다면 100가지는 족히 될 정도로 많다. 그만큼 매장도 자주 드나들었지만 나는 어쩐지 환하게 웃는 직원분의 응대를 받는 것이 늘 불편했다. 뚜렷하게 살 것이 있다면 그나마 나았고, 가끔 시향만 하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침묵을 정리하고 나와야 할지 민망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의 투명도를 스르륵 올려 슬그머니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번에는 사고 싶은 것이 정해져 있으니까. 조금은 속 편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갈색의 분위기가 나를 껴안았다. 어서 오세요! 밝고 경쾌한 인사를 건네는 직원분 뒤로 나무껍질과 시트러스 향이 얼룩덜룩 뒤섞여 스며들었다. 나는 인사와 함께 냅다 본론부터 꺼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이더시스 시향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어쩌지, 이더시스 지금 품절이에요. 재고 안 들어온 지 꽤 되었는데. 그 대답을 들은 순간 그대로 뒤로 돌아 나가야 하나 생각했다. 옷 가게에서 피팅만 해도 눈치를 볼 정도로 얼굴이 얇은 나에게는, 정말이지 머릿속이 꼬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직원분을 따라 매장 한 바퀴를 돌며 추천을 받고 있었다. 이건 ‘비레레’라고, 최근에 나온 향인데 착향 도와드릴게요. 직원분의 손놀림과 함께 베르가못과 갈바넘 향이 상쾌하게 터져 나왔다. 손목에 코를 대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니 ‘초록이 우거지다‘라는 이름의 뜻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향이 정말 좋네, 좋은데… 그래도 나는 이더시스가 사고 싶은걸.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나와 달리 직원분은 생글생글한 얼굴로 손까지 씻겨주겠다고 하셨다. 제라늄 향의 스크럽과 핸드워시로 개운해진 손은, 새로 조립된 로봇의 손처럼 차갑고 부드러운 감각을 주었다.
아까부터 책 들고 계시던데, 이은규의 ‘다정한 호칭‘… 어머, 저도 읽었던 시집이에요.
아, 이거 북 익스체인지 하고 있다고 들어서 가지고 왔거든요.
맞아요! 딱 어제부터였는데,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실래요?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자니 이제는 조금 해탈한 기분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곧이어 직원분은 장진영의 ‘우아한 유령‘을 곱게 포장해 건네주셨다. 그런데 책 정말 깨끗하게 보셨네요. 새 책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최근에 구입하셨어요? 아, 고등학생 때 읽던 거라 한 4년 전에 샀어요. 세상에, 책 관리를 어쩜 이렇게 하지. 천천히 넘겨보시며 웃는 모습에 읽기 전마다 손을 씻는 결벽증이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뻤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제가 이더시스 사려고 마음을 정하고 왔던 거라, 사실… 당장은 구입할 건 없는 것 같아요. 시향 친절히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쉬워라. 저도 이더시스 정말 좋아하는데, 비레레가 마음을 돌리지 못했나 보네요. 그럼 다음에 또 들러주세요.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직원분은 조금의 태도 변화도 없이 문을 열어 주겠다며 입구까지 함께 나와주셨다. 근처에 사세요? 아니요, 원래는 서울 살고 여행 온 김에 들렀어요. 아, 바깥쪽에 캐리어 고객님 거였구나. 매장 안에 두셨어도 되는데! 여행 동안 즐거운 추억들만 담아 가시면 좋겠어요. 좋은 책 가지고 와 주셔서 감사해요.
가벼우면서도 풍족해지는 이 기분은 과연 뭘까. 사람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결국 나는 사람을 제일 좋아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혼자 있는 걸 너무 좋아하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걸 귀찮아하고, 북적거리는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걸 싫다는 말로 뭉뚱그려 버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런 혼란을 단번에 지워버릴 만큼 나를 채워주는 것도 언제나 사람에게서 전해받는 따뜻함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허기진 기분이 들어 점심식사를 하러 걸음을 옮겼다. 미리 계획한 오늘의 점심메뉴는 흑돼지 유부초밥.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제주까지 온 김에 특산물 하나쯤은 먹어보고 싶었고, 수비드 한 돼지고기가 부드럽고 촉촉하다는 평이 많아 여행의 첫 식사로 정해두었다. 거리가 멀지 않아 음악을 들으며 가볍게 걸어가니 곧 도착했고, 사장님은 활기차게 인사하며 캐리어 보관하는 곳을 안내해 주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빠르게 물과 반찬을 가져다주시는 모습에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메뉴판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칼국수, 칼빔면, 홍국수… 유부초밥은 어디 있지? 알고 보니 그곳은 국수가 메인인 식당이었고 흑돼지 유부초밥은 사이드 메뉴였다. 세상에, 가격대도 있고 양도 많길래 이럴 줄은 몰랐는데. 국수류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타고나길 소화기관이 별로 좋지 않아 메뉴 두 개를 시키기에는 무리일 것 같았다. 이미 반찬도 가져다주셔서 나갈 수도 없는데.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조심스레 사장님께 여쭈어보았다. 죄송하지만 혹시 유부초밥만 시켜도 될까요? 제가 이거 먹으러 온 건데, 사이드 메뉴이길래…
안 되면 포장해 가야겠다. 긴장한 표정의 나와는 달리 사장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신 듯 그럼요, 먹고 싶으신 대로 편하게 시키세요, 하며 문장에 리듬까지 실어 노래하듯 대답해 주셨다. 그렇게 주문한 흑돼지는 리뷰에서 본 대로 씹을 것도 없이 부드러웠고,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물티슈로 손을 닦고 립스틱을 바르고 있을 즈음에는 사장님께서 직접 구운 프렌치토스트까지 서비스로 가져다주셨다.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스스로 길고 정성스러운 식당 리뷰를 남겼다.
겁이라는 게 사실 거창할 게 없지. 가위에 눌려 귀신을 보았다든가, 눈앞에서 멈춘 오토바이를 마주했다든가, 그런 공포를 느껴야만 겁이 아니니까.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밉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늘 겁났고 그래서 열심히 피해 다녔다. 그 마음은 언제나 나를 뒤쫓아 다녔으니, 이번 여행에서도 아무것도 겁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야. 하지만 생전 처음 본 사이에도 내게 친절한 타인들은 늘 있었다. 내가 지금보다 부족한 모습이더라도 태도를 다르게 하지 않을 사람들이. 나는 스스로에게 친절하지 않아서 그들에게 늘 압도되는 걸까.
식당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양손에 물컵을 들고 걸어가는 유치원생이 한 명 보였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가 문득, 방이 분리된 식당이라 문을 열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시 되돌아가 한 발 앞서 문을 열어주니 아이는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겨 식당 밖으로 나서려던 찰나, 뒤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내 걸음을 붙잡았다.
언니! 이거 드세요. 아까 문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구.. 언니 완전 예뻐요. 짧은 머리 잘 어울려요.
그 아이가 내게 내민 것은 노란색 비타민. 고마워요 공주님. 살포시 대답하자 아이는 헤헤 웃으며 분홍색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뛰어갔다. 아이들에게 듣는 칭찬은 그 누구에게 받는 인정보다도 기분이 좋다. 내가 미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건 공주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하는 나와 비슷한 마음에서 나온 표현이겠지.
나는 당장 줄 수 있는 게 없네, 가방에 초콜릿이라도 있었다면 좋으련만. 오늘 초콜릿을 가지고 왔다면 쥐여주고 싶은 사람이 몇 명이던가. 이런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내가 사람을 정말로 싫어하나?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