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일
겨울 냄새는 알아도 연초의 향은 아직 잘 모르겠다. 연말과 연초는 과연 다른 냄새가 날까? 정반대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상으로는 하루밖에 차이 나지 않는 그 둘을 과연 감각으로 구분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 시기에는 많이들 신년 계획을 세운다. 나는 새해 계획이나 목표를 한 번도 세워본 적이 없다. 바로 어제 다녀온 강릉 여행만 해도 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 갔는데, 한 해에 대해서는 예측하거나 통제하고 싶다는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떡국도 좋아하지 않아서 가족 모두가 떡국을 먹을 때 혼자 꿋꿋하게 밥을 먹을 정도로 별 감흥이 없다. 나에게 1월 1일은 그저 주변 사람들과 좋은 말들을 몇 마디 더 나눌 뿐인 평범하고 평범한 겨울날이다.
다만 올해는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나는 늘 눈에게 차가운 온도와 부드러운 물성이 공존하는 걸 어색하게 느꼈는데, 그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아마 성인이 되었다는 자유와 책임의 공존에서 오는 묘한 기분인 것 같다.
이전에는 술을 한 모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오늘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 왔다. 쳐다본 적도 없는 주류 냉장고 앞에 서서 한참 고민하다 일반 맥주보다 도수가 많이 낮은 복숭아 맛, 레몬 맛 맥주를 골랐다.
계산대로 맥주를 가져가자 점원 분이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민증 검사. 평소라면 편의점에 갈 때 모자를 쓰고 갈 텐데 오늘은 민증 검사를 위해 맨 얼굴로 집을 나섰다. 신분증을 한참 바라보시길래 설마 사진이랑 실물이 그렇게 다른가 싶어 긴장했다. 헤어롤이라도 풀어야 되나? 안경을 벗어야 되나? 아니, 내 화장이 그 정도 실력이라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점원분은 곧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아, 하고 작게 헛웃음을 지으셨다.
오늘이 1월 1일이었죠? 깜빡했네. 결제해 드릴게요.
왜인지 반가워서 같이 웃음이 나왔다. 나보다도 새해에 무딘 사람이 있구나. 평소라면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 두 마디 인사만 하고 맥주를 챙겨 나왔을 텐데 오늘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얼어붙은 시계의 초침 정도는 녹일 수 있기를 바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점원분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같이 인사해 주셨다.
엄마가 안주는 어떤 걸 먹고 싶냐고 물어보셔서 그저께쯤 간식으로 사다 둔 매운 새우깡을 먹겠다고 대답했다. 너무 평범하고 소박한 거 아니냐고 반문하셨지만 굳이 처음이라는 이유로 화려하게 술상을 차려 먹고 싶진 않았다. 내 취향이 원래 이런데, 뭐.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면 계란 초밥이라고 대답하는, 그런 밍밍함 속 약간의 달콤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였다.
올해도 기분만 조금 미묘할 뿐 별다른 계획은 없다.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가끔 글을 쓰고, 더 가끔은 오일 파스텔이나 프랑스 자수를 하겠지.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다니는 것도 좋지만 가만히 버스에 타서 멍 때리는 것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대화를 하며 맛있는 디저트를 한 조각 먹을 것이다. 그런 밍밍하면서도 폭신한 인생에 나는 만족한다. 행복이란 달콤함은 계획되지 않고 느닷없이 찾아오니까, 내가 바라는 행복은 별로 거창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신년에 1년 치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는다. 하루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일 단위 계획을 매일 새롭게 세우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다양한 새해 인사 중에서도 어쩐지 평범하고도 평범한 ‘건강하세요’를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된다. 다만 상대방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을 담다 보니 평범하기만 하진 않은 인사라고 기대해 본다.
다들 건강하세요. 올해에도, 내년에도. 건강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해서, 건강하라는 새해 인사에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일상을 오래도록 보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