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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Apr 02. 2023

지하철에서

부질없는 아쉬움

여느 때처럼 2호선 열차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힘겹게 서 있던 날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라서 대중교통을 타면 주로 멍을 때리거나 풍경을 구경하면서 잡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날에는 낯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시선이 허공에서 배회한다. 어쩌면 어색해하는 건 나뿐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의 두 눈은 손 위의 작은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요즈음 자주 타는 지하철 노선에는 지상으로 올라가서 달리는 시간이 잠깐 있다. 애매하게 지하철 좌석 옆의 손잡이만 쳐다보다가, 그 시간에는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일종의 루틴이 되었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바로 옆에 서 계시던 승객분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창밖으로 멍을 때리는 내가 눈에 띄셨나 보다. 내 두 눈을 잠시 바라보시더니 곧이어 내 시선을 따라 함께 창밖을 바라보셨다. 토요일 오후 네 시의 한강은 그날따라 햇빛에 반짝거렸고 확실히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풍경이었다. 그분은 멈칫하시더니 그대로 지하철이 다시 지하로 내려갈 때까지 같이 창밖을 구경해 주셨다. 내 지레짐작에 착각이 가미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시선은 거짓말을 안 하니까 그분께도 한강이 아름다웠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눈에 담느라 한강 사진을 찍어두진 못했다. 햇빛이 닿으면 많은게 아름다워 보인다.

환승한 열차는 비교적 여유로웠다. 오히려 사람들이 없으니까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균형 잡기가 어려워서 문 앞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내 앞에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관심을 두지 않다가, 내 귀를 사로잡는 말이 들려왔다.


아빠! 내리시는 문이 오른쪽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쪽이 오른쪽이지만 내가 뒤돌아서면 저쪽이 오른쪽이잖아. 그럼 어느 쪽으로 내려야 해?


이럴 수가. 내가 어릴 때 하던 고민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나는 저 생각으로 몇 달을 혼자 끙끙거리다가 결국 엄마께 여쭤봤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지하철이 달리는 방향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알려주셨고, 지하철이 어느 쪽으로 달리냐는 질문에도 차근차근 대답해 주셨다. 혼자 괴로워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쉽게 해결되어 그 당시에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것 마냥 신기했다.


과연 저 아버님은 어떤 답변을 주시려나. 나름 열심히 설명해 주셨지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조금 당황하신 듯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꼬마는 아버님의 설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 더 되풀이해서 물어보더니 제 풀에 지친 듯 이쪽 방향으로 섰다가, 다시 뒤돌아섰다가를 반복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폴짝 뒤돌아선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까딱 하며 손을 살짝 흔들자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같이 손인사를 해 주었다. 내가 원래 오지랖을 부리는 성격이 아닌데, 이건 정말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아쉽게도 아버님이 이번에 내려야 한다고 꼬마의 손을 잡으셨다.


오늘은 몇 명이나 지하철 창 밖을 바라봤을까. 몇 명이나 시선을 낮추어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았을까. 물론 나도 그 귀여운 순간들을 항상 포착하는 건 아니고, 저 날이 유난히 운이 좋았던 날이지만 그래도 내가 본 것을 같이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자주 아쉽다.


잠깐이라도 휴대폰 화면을 꺼서 주머니에 넣고, 잠깐이라도 두 귀를 막고 있는 무선 이어폰을 빼 주길 바라는 부질없는 투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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