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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Apr 16. 2023

야간 비행

would you dance with me

저녁에 운동을 시작한 지 5개월 정도 지났다. 일주일에 세 번씩 저녁 8시 40분에 집에서 나와 체육센터까지 걸어간다. 우리 동네에서 10년을 훌쩍 넘게 살면서도 체육센터 가는 길에 포장마차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 앞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풍경도.


그날은 내 옆에 자전거가 멈춰 섰다. 함께 운동하는 분들이 대부분 나와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중년 여성 분들인데, 그분은 내가 허리를 굽혀 인사할 때마다 활짝 웃으며 안아주시는 분이었다. 나도 그분의 나이가 되면 눈 옆에 저렇게 예쁘게 주름이 잡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분은 그날도 눈이 가늘어지게 웃으시며 "타!"라고 박력 있게 외치셨다. 내 몸무게를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며 무겁지 않으시려나 머뭇거렸다. 내 고민이 눈에 보이셨는지 괜찮다고 재촉하셔서 못 이기는 척 뒷좌석에 앉았다.


몸이 살짝 뒤로 기울어졌다 이내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고작 뒷좌석에 편하게 앉아있는 주제에 조금 긴장했는데, 그 감정이 무색하게도 자전거는 안정감 있게 달려 나갔다. 평소보다 시야가 조금 낮아지자 낯설었다.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시선을 들자 얼마 전 비가 왔음에도 아직 나무에 남아있는 꽃들이 보였다. 체육센터에 가까워지자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평소에 느리게 흘러가던 익숙한 풍경들이 흐릿한 빛으로 뭉개졌다.


그분과 짧지만 많은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내 이름을 물어보셨다. 나는 늘 체육센터에서 '막내'라고 불렸기 때문에 지금껏 이름을 물어보신 분이 한 분도 없었다. 그게 싫지 않았음에도 그분이 내 대답을 듣고 곧바로 이름으로 불러주시자 기분이 묘했다. 한겨울에 벚꽃이 만개하면 이런 느낌이려나. 그분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딸이 있었고 이따금씩 나를 당신의 딸과 겹쳐 보시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날 뒷좌석 앉아 지금 나이의 절반도 채 되지 않던 때에 엄마가 나를 자전거에 태워주시던 시절을 부유했다. 그 기억을 가두고 싶지는 않아서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분을 차마 꽉 껴안지 못하고 두 팔을 조심스레 두르고 있었던 것처럼.


현실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괜히 애꿎은 꽃잎들만 바라보았다. 작은 바람에도 수도 없이 떨어지는 꽃잎들은 지독히도 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나는 늘 부모님의, 친구들의 애정에 기대어 그들의 뒷좌석에 앉아서 자라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한 따뜻함에 향수가 뒤섞인 그날의 기분은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밤 10시가 되면 수업이 끝나고 집까지 다시 걸어온다. 가끔 수업 중에 강사님께서 춤을 추다 나에게 손을 내미실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왈츠를 추듯 스텝을 밟는다. 아니, 사실 매번 긴장해서 스텝을 다 까먹어버리고 엉킨 두 발을 풀어내듯 움직인다. 나에게 밤의 시간은 늘 그런 느낌이다. 익숙하지 않지만 언제나 내 손을 겹쳐 올리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바스락거리는 흰색 이불속에 누웠다. 손을 뻗어 램프를 끄는 순간 찾아오는 어둠은 조금 더 짙은 색이고, 그 색깔은 매일 마주해도 언제나 어색하다. 가끔은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평등한 시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두 눈이 캄캄함에 적응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건 누구에게나 매한가지일 테니까.


엎드린 채로는 잠에 들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베개에 턱을 괸다. 밤이 주는 약간의 자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명을 지르면 잠꼬대라는 면죄부가 생기고, 눈물을 흘리면 악몽이라는 핑곗거리가 생기고.


언젠가 홀로 심야영화를 보러 가고 싶다. 평소에는 거의 즐기지 않는 팝콘을 먹으며. 누군가의 애정과 걱정을 뒤로한 채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텅 빈 거리에서 어쩌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이다. 밤과 손을 마주 잡고 자유의 춤을 추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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