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비가 오기 전에
세상 사람들을 둘로 구분하라면 다양한 기준이 있겠지만, 비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늘 완벽한 후자에 속해왔다.
그런 면에서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하는 방식은 꽤나 본질을 관통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자신은 빗소리의 투박한 울림을 좋아하는 반면, 나는 산책을 가기 힘들다는 이유로 비 오는 날을 꺼려하던 것을 회상했다. 그래도 실내에 있는 건 좋지 않느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늘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습하고 끈적끈적한 공기는 실내에서든 실외에서든 온몸에 달라붙어 내 기분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 우리는 산책을 했다. 그 사람이 그늘에서 걷는 동안 나는 늘 햇빛 아래에서, 아슬아슬한 그림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었다. 그 사람은 선선한 바람에도 춥다며 카디건을 걸치고, 모두가 기피하는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를 단 한 순간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꽤나 따뜻하게 바라봐주긴 했던 것 같다. 나를 계속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 사람과 함께하지 않은 산책도 물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은 내 인생에서 딱 한 번, 빗속에서 우산 없이 걸어본 날이었다.
2년 전 비가 오던 날, 나답지 않게 비 오는 날에 산책을 하러 운동장 쪽으로 나갔다. 우리 학교는 건물 아래로만 걸으면 비를 맞지 않고도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친구와 회색 건물 아래로 비를 피해 걷다가, 친구를 뒤로한 채 그대로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시원할 것 같았다. 얼룩덜룩한 기분을 아예 폭삭 젖게 내버려 두면 얼룩이 눈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가 아니면 뛰어들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기겁하는 친구를 뒤로한 채 하얀색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운동장을 휘적휘적 걸었다. 슬리퍼를 신고 있어서 발까지 순식간에 젖었다. 티셔츠 위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축축 늘어졌다.
아, 이것 참, 생각보다 기분 별로네.
생각만큼 개운하지는 않았고, 생각보다 눈이 잘 안 떠지지 않았다. 그날 내리던 비는 장대비였는데, 저렇게 억수같이 쏟아지면 조금 시원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착각에 불과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눈을 뒤덮는 물방울들을 쉴 새 없이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를 좋아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이렇게 지나가 버렸네. 저녁 자습을 하러 도서관에 가기 전에 급히 빗물을 털어내며 생각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덧 유월이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되겠지.
너무나도 싫어하는 손님이 찾아오는 그 긴 시간을 내내 우울하게만 보낼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나를 위한 레시피를 적어보려 한다. 비 오는 날을 반가워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날로 보낼 수는 있도록 양념을 준비했다.
장미 줄기 향이 나는 향수(비 오는 날에 뿌리면 물먹은 장미 향이 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표지의 앨범 6번째 트랙
영화 '어바웃 타임'
벚꽃이 그려져 있는, 수건 재질의 카디건
버스 맨 뒷자리
바스락거리는 흰색 침구
밖에 나가야만 하는 날이면 향수를 뿌리고 노래를 들으며 걸을 것이다. 카디건을 걸쳐 입고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빗물에 흐려진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도 있다. 한가로운 휴일이라면 침대 속으로 들어가 영화 '어바웃 타임'의 비 오는 결혼식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는 것도 좋겠지. 그 속에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화사한 여름날을 보낼 것이다.
우산과 우산 사이에서는 팔짱을 낄 수 없듯이, 영원히 비와 친해지지 못할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