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 Sep 08. 2016

나는 모든 걸 망친다

초원 위에서 유일하게 외로운 '인간'

태양이 세렝게티를 달구기 시작하면 동물들도 움직임을 멈춘다… 자리를 잘 떠나지 않는다. 이유는? 더우니까! 이 따가운 햇볕에 털옷까지 입고 있으니 오죽이나 더울까. 한낮엔 그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몽구스처럼 주변을 경계하며 선잠을 자는 게 전부다. 물론 초원 위에서 예상은 예상일 뿐이라, 갑자기 뛰어나가서 사냥을 한대도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앞의 이 치타는 안 움직일 것 같다. 배도 빵빵한 것이 무언가 잡아먹은 것 같고 20분 전쯤 물도 먹고 왔기 때문이다.


안심을 하고 운전수와 도시락을 열었다. 도시락은 매일 똑같다. 과일잼을 바른 샌드위치와 참치마요네즈 샌드위치 각각 하나 그리고 주스 한팩. 잼의 종류는 어쩌다가 한번 바뀌는데, 바뀐다 한들 이젠 다 똑같게 느껴진다. 딸기든 포도든 중요한 건 뱃고동 같은 꼬르륵 소리가 오디오에 안 잡히는 거다.


포슬포슬한 털이 뒷통수에 남아있는 귀여운 치타. @2016 세렝게티 골고피와 바라푸코피 사이.

식곤증도 물리칠 겸 치타 꼬리의 줄무늬를 세어본다. 더워지면 기승을 부리는 파리떼를 쫓느라 휘릭 휘릭 마구 움직이기 때문에 나름 어렵다. 꾸벅꾸벅 조는 치타는 참 귀엽다. 사실 졸고 있지 않아도 귀엽다. 포슬포슬한 털도 귀엽고 파리 쫓느라 팔랑팔랑 움직이는 귀도 귀엽다. 고양이과답게 그루밍도 열심히 하고, 꼬리로, 부족하면 손으로, 얼굴의 파리를 쫓기도 하는데 당연히 못 잡으니 '셀프 싸대기' 같은 웃긴 상황도 연출한다. 치타 너머에는 톰슨가젤이 풀을 꼬약꼬약 먹고 있고 가끔 뒷다리로 배를 긁기도 한다. 생긴 것도 얌생이 같은데 저러고 있으니 참 촐싹 맞아 보인다. 고스트 버스터즈 때문에 코리트버스터라고 맨날 말실수를 하는 코리버스터 새는 오리처럼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어쩌면 한자리는 날 위해 남겨놨을지도 모른다. @2016 세렝게티 트라이앵글 지역.
진흙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코끼리 가족들. @2014 루아하 국립공원.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하는 얼룩말들. @2015 세렝게티 키라위라 레인저포스트 근처.

이 시간대의 초원은 평화롭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매일 똑같은 도시락처럼 지겨울 때도 있지만 이 순간의 고요함이 참 좋다. 모든 생명체가 초원에게 조용히 안겨있는 것 같다. 사자도 서로 머리를 비비고 낮게 으르렁거리며 서로 품을 내준다. 진흙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코끼리들은 ‘스윽스윽’ 소리를 내며 코로 풀을 감아올리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 소리가 꼭 골목길에서 누군가 빗자루질 하는 것 처럼 들린다. 누우 떼의 도떼기시장 같은 울음소리도 잠시 멈춘다. 그늘이란 그늘은 다 차지하고 들어가 앉아 명상이라도 하는가 보다.


아름답고 넓고 평화롭고 고요한 초원. 어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할까. 아니,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초원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예전엔 인간도 동물도 다 같이 여기서 살았을 텐데. 나도 저 안에서 함께 고요한 행복을 느끼고 싶다. 치타 옆에 앉아 포슬포슬한 뒤통수도 쓰다듬고 사자들과 같이 풀밭 위를 뒹굴거리고 코끼리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싶다. 하지만 차 밖으로 한발 내딛는 순간, 난 모든 걸 망친다. 


눈으로만 담자. 마음에 담으면 이렇게 힘들다.


매거진의 이전글 얼룩말 무늬는 흰 바탕일까, 검은 바탕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