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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 차리라고 소리치는 남자

by 김준정

결혼하고 아빠는 매일 아침 전화를 했다.


"아빠, 오늘 늦잠을 자는 바람에 남편 아침밥 못해줬어."

"요새 아침밥 얻어먹고 다니는 남자가 잘 있나 어데."


일요일 아침에도 7시면 식탁에 앉아서 엄마를 채근하는 사람이 우리 아빠였다. 주말만이라도 천천히 먹으면 안 되냐는 엄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던 아빠였는데, 이건 무슨 소린지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아버지는 아침 식사하셨냐”라고 하니까 "내야 묵었지." 태연하게 응수하는 아빠.


결혼을 하면서 고향인 대구를 떠나 군산에서 살게 되었다. 아빠는 전화를 해서 내 신혼 생활을 사소한 것까지 알고 싶어 했다.


"임부복 사라고 50만 원 보냈다. 임신을 많이 해봐야 평생 두 번밖에 안 할 건데 한번 입고 버려도 참한 거 사 입어라. 내 또 보내 주께."


아빠 말에 문득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났다. 엄마는 만삭 때 '월남치마'를 입었다고 했다. 공장에 점심으로 가져갈 국수를 머리에 이고 걷는데 치마가 배 때문에 자꾸 말려 올라갔다고 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치마를 끌어내리기를 몇 번을 해야 했다고. 성가신 것보다 부끄러웠다고 했다. 한 손은 머리에 얹힌 국수 쟁반을 붙들고 한 손은 주전자를 들고 가는 엄마를 상상했다.


아직 어린 새댁은 자신의 처지를 그저 알아주는 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아빠였더라면 충분했는데. 엄마가 아빠하고 싸울 때마다 자동으로 무한 재생되던 임부복 얘기가 내가 임신을 하고 나서야 들린다.


“아빠, 엄마도 임부복 사줬어?”

“그때는 먹고살기 바빠가 그런 기 있었나 어데”


아빠의 말과 달리 엄마는 시장에 임부복으로 나온 치마가 있었다고 했다. 몇 번을 사고 싶었지만 사지 못했고 그걸 입은 여자를 보면 부러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했다. 서러움 아니었을까?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뒤를 쫓던 엄마의 감정은. 아빠가 사주려고 했어도 엄마는 받지 않았을 거다. 가진 것 없는 젊은 부부는 어떻게든 빨리 기반을 잡고 싶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믿을 건 건강한 자신의 몸뚱이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였다.


아빠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처음으로 배정받은 부대에서 전사자의 군복과 사물함을 지급받았다고 했다. 어느 곳보다 죽음과 가까운 곳에 왔다는 실감이 난 순간,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회지에 나가서 기술이라도 배우려면 방을 얻을 돈이 필요했다. 아빠는 이왕 하는 군생활인데 월급을 더 많이 주는 베트남 파병을 신청했고, 우리 아빠가 외국을 나가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원에 있는 2주 동안 엄마와 같이 있었다. 웬만큼 움직일만해서 엄마한테 대구로 가시라고 했는데, 아빠가 한사코 못 오게 했다. 아빠는 모유 수유하는 내가 젖 마사지할 때 손목에 힘이 들어가면 나중에 고생한다며 엄마한테 하라고 했다. 젖 마사지를 하기 위해 그 후로도 엄마는 석 달을 돌아가지 못했다.


“전생에 부부였는갑다. 너거 아빠가 하는 거보만. 누가 딸한테 이래 해주겠노.”


내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잣말을 했다. 출산을 한 딸이 안쓰러우면서도 유난을 떠는 남편이 야속해서다. 같이 고생하며 살았으니 그 속 누구보다 잘 알지만 엄마도 여자인데 지금에 와서라도 “당신은 산후조리라는 것도 없었네. 미안하구마.” 말해주면 어때서. 그 한마디 때문에 엄마는 복잡한 것 같았다.


아빠는 마음속에서 자신이 약해지는 소리에 귀를 막으며 살았다. 엄마는 또 다른 자신이기에 돌보아 줄 대상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러면 자신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서 모른 척한 걸까.


막막한 두려움 속을 혼자 헤쳐 나올 때, 간절히 필요했던 것은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의 지지가 있었다면 외롭고 불안하지 않았을까. 사는 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그 사람을 아빠는 결국 자신이 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부터 30살 결혼하기 직전까지 아빠와 나는 정서적 절연기였다. 한 집에 살았지만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나를 못마땅해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재수를 시켜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아빠는 내게 학교가 마치면 저녁 먹기 전에 집에 들어와야 한다고 했고 술도 한 달에 한번 어쩌다 먹는 거라고 했다. 내가 입고 다니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고 화장이 진하다고 했다.


오빠한테 하지 않는 그놈의 ‘여자라서’라는 이유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교복만 입다가 멋을 내려다보니 옷을 고를 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약간의 패션 테러 시기를 겪고 있었을 뿐이었고 화장도 마찬가지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에 화장기술을 익히려면 내 얼굴을 도화지 삼아 마구 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귀가시간도 문제가 없었다. 술을 먹느라 저녁을 먹지 않았으니까.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시기에 우리는 다시 가까워졌다. 아빠는 내가 자신의 기대에 충족할 때만 무한한 애정을 보내줬다. 내가 아빠의 보호 아래 있을 때, 그 울타리 안에 꽃처럼 존재할 때만 물을 주었다. 아빠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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