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아빠가 밥 먹자고 오면, 우리는 연탄이 꺼진 줄도 모르고 찬 방에 있었다. 나는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번개탄과 라면을 사러 갔다. 아빠가 후후 불며 번개탄에 불을 붙이면서 우리에게 고개 돌리고 숨을 참으라고 했다. “연탄가스가 머리를 나쁘게 한다”고 했다. 엄마가 빠진 밥상에 셋이 둘러앉아 라면을 먹었다. 그럴 때 아빠는 말이 없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고생한 자신보다 우리들이 불쌍해서 아빠는 라면 한 가닥도 편하게 삼키지 못했다.
아빠는 자신의 경험 안에서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을 주려고 했다. 엄마가 일하러 간 건 돈 때문이고, 돈이 없어서 우리가 보살핌을 못 받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미안함 때문에 딸은 같은 일로 마음고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는 나한테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빠 말을 종합해보면 ‘꽃꽂이 같은 취미 생활을 할 정도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가진 주부’가 나의 롤모델인 것 같았다. 아빠가 시켜서 ‘알공예’를 배우기도 했다. 타조알로 마차를 만들고, 거위알로 보석함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나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아빠의 말에 의하면 ‘능력이 있는 남자들은 맞벌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취직하지 말고 꽃집을 하다가 결혼하면 된다고.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해봤고, 인생을 살아봐서 안다고 말하는 아빠를 설득할 근거 같은 게 내게 없었다. 아기코끼리를 쇠사슬에 묶어놓으면 나중에 몸집이 커져도 쇠사슬을 뽑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나는 아기코끼리였다.
대학교 입학 후에 첫 성적표가 날아왔다. 거기에는 ‘성적 우수자로 등록금 면제’라고 적혀 있었다. 잘못 배달된 게 아닌가 봉투의 주소란을 확인했지만 분명히 내 이름이었다. 당시 나는 남자 친구를 사귀어볼 심산으로 공대에서 개설하는 교양강좌를 다수 신청했다. 그게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입시의 터널을 지나자마자 군대라는 더 큰 속박에 묶여야 했던 이들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낳은 결과였다. 그들이 굳건히 하위권 성적을 지켜준 덕분에 내가 과톱을 하고 말았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모의고사 점수는 한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 수능시험일이 닥쳤고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다. 게다가 점수를 맞춰서 간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전망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반수를 해야겠어요. 약대나 한의대 가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내 말에 아빠는 당황하더니 딱 잘라 말했다.
“네가 아들이라면 몰라도 딸을 그렇게까지 지원해줄 수 없다.”
지금도 나한테는 가슴에 사무치는 말이었다. “딸을 유학까지 보내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 된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다”이라는 아빠의 말. 형편이 어려워서 안 된다고 했다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거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꼈던 오빠와의 차별이 몸서리치게 서운했고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나이트클럽을 갔다. 자취하는 친구 집에서 지내며, 학교도 집도 가지 않았다. 시험을 치지 않아서 학사경고를 세 번(일명 쓰리고) 받았다. 제적을 당할 위기에서 간신히 졸업했다. (나 한 사람의 졸업을 위해 참으로 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아빠를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자란 환경은 정상 범위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우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부터는 내가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분명 나를 사랑했는데 차별했다. 나를 편애하기도 했고 소외시키기도 했다. 그동안은 혼란스럽지만 그냥 좋은 것만 생각하자고 덮어두고 살았다. 하지만 그것에서 내가 어떻게 조련이 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20살 때처럼 나를 소모시키고 싶지 않은 방법으로 찾아가고 싶었다.
딸과 아들에게 다른 성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아빠 개인의 견해가 아니었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랬다. 오죽하면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도 나왔겠는가. 자신도 여성으로서 남자 형제에게 양보하고, 교육도 못 받았으면서도 아들만 위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 세대였다.
선반 CNC 기술을 배운 아빠는 자신이 너무 배고팠기 때문에 내 자식만큼은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았다. 처음으로 전셋집을 얻을 때, 집과 공장이 붙은 곳을 찾았다. 엄마를 대신해 우리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섬유공장에서 일했던 엄마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다. 엄마와 아빠는 정말 밤낮없이 일했다. 새벽까지 공장의 기계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우리의 탐구생활 방송시간을 챙기고, 문구점에서 비닐을 사 와서 교과서를 싸주었던 아빠였다.
자신이 원하는 걸 자식도 원할 거라고, 어려서 잘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요구와 상관없이 아빠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왔다. 20살의 나는 아빠에 대한 분노를 나를 향하게 했다. 아빠의 소중한 것이 나라는 걸 알기라도 하듯 나 자신을 망침으로써 아빠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20년이 지났다. 이제는 작은 키로 아빠를 올려다본 그때와 다르다. 같은 눈높이로 아빠가 바라본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