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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도 함께도 힘들었던 이유

by 김준정

<우아하고 유쾌한 여자 축구>는 김혼비 작가가 축구를 보기만 하지 말고 직접 해보자는 생각으로 아마추어 여자 축구팀에 입단한 이야기다.


<좋은 생각>에 실린 김 혼비 작가의 글을 읽고, 개성 있고 심플한 유머가 돋보인다고 생각했다. 다른 작가와 구분이 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그게 뭘까? 이 작가의 글을 읽어봐야겠어, 그런데 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무튼, 술>은 축구만큼이나 술을 좋아하는 김혼비 작가가 제목 그대로 술을 찬양하는 글이었다. 재치는 돋보였지만 읽을수록 이런 책을 읽을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어차피 책이라는 게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 몫이니까 김혼비 작가도 이해해 줄거라 믿는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읽었던 책을 먼지를 털고 읽었는데,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무튼, 술>도 책꽂이에 있는 한 얼마든지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글을 쓰고 난 후에 다시 읽었는데 유머 속에 작가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아하고 유쾌한 여자 축구>는 단순히 축구 얘기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초개인주의자라고 표현하는 작가가 팀 스포츠를 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을 무겁지 않게 전했다. 사람들과 함께할 때의 즐거움을 말하면서도 어느 한쪽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몰랐던 세계가 있고 마냥 기피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겪어보려는 듯했다. 예의 그 발랄한 태도로 말이다.


나는 산악회에 가입해서 부모님 연령대의 회원들과 산행을 하고 있다. 서로 통하는 것이 없을 것 같지만 같이 땀 흘리고 비를 맞고 하다 보니 한 팀이라는 의식이 저절로 생겼다. 앞에 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이를 위해 나뭇가지를 치워주고, “나무”혹은 “바닥 미끄러워”라는 말로 경고를 해준다.


10월에 화악산을 갔을 때다. 난데없이 눈이 와서 발을 딛는 족족 미끄러졌다. 높이 1468미터 고산인 데다 경사도 급해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경험이 많은 선배들은 아이젠을 준비했지만 나 같은 얼치기는 10월에 눈이 올 거라고 상상조차 못 해서 아이젠이 없었다. 대여섯 번을 넘어지고 나니 나는 그만 겁에 질려버렸다. 이건 조심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음으로 변한 가파른 길을 딛지 않고서 내려갈 수도 없고 그대로 있을 수도 없어서 그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팀장님이 스틱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거꾸로 걸으며 쌓인 눈을 걷어내고 흙이 나올 때까지 땅을 헤집었다. 그렇게 파인 홈으로 발을 디디라는 뜻이었다. 팀장님은 두 시간을 꼬박 스틱과 얼음과 땅과 사투했다.


이제는 엉덩이가 아니고 가슴이 묵직해졌다. 가슴속에 얼어있던 무언가가 녹았는지 눈물이 새어 나왔다. 창피해서 눈물은 장갑으로 쓱 닦아버렸지만 그때의 감정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한 게. 버스가 군산에 도착할 무렵이면 회원 중 한 명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버스 통로를 지나가며 쓰레기를 수거한다. 그걸 하던 김총무가 이사를 가면서 팀장님이 쓰레기봉투를 들길래 내가 뺏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서 시작한 등산이고, 일 년을 혼자 산에 다니다가 산악회를 알아보게 되었다. 내가 느낀 우리 산악회는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무뚝뚝하다고 느꼈을 정도로 외골수나 고집이 있어 보이는 회원이 많았다. 왠지 고지식하다거나 융통성 없다는 말로 통할 것 같은 사람들의 집합체 같았다. 나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편하게 느껴졌을까?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내가 매달 세 번의 정기 산행이 있는 우리 산악회에 들어온지도 2년이 넘었다. 새벽 5시 30분에 버스에 올라서 6시간 산행을 하고 밤이 되어서 헤어지는 일을 꼬박꼬박 하다 보니 자연스레 곁이 편해지고 마음이든 음식이든 주고받는 것이 많아졌다.


김혼비 작가는 일주에 두 번 있는 연습을 하고 팀원들과 점심만 먹고 집으로 간다고 했다. 다른 팀원들은 몇 차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를 즐기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자신은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을 바꾸지 않고도 사람들과 즐길 수 있는 거였다. 어쩌면 나는 그런 기술이 없어서 혼자도, 함께도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산악회는 나에게 새로운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장이었다. 열 살,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회원들이 가족 중 어른이 아닌, 혹은 직장 상사가 아닌 다만 같은 취미를 즐기는 동료라는 것이 말이다. 친구의 의미가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아빠보다 한 살이 많은 분을 ‘가짜 아부지’라고 부르며 장난을 칠 때면 우리 아빠와도 이런 경박한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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