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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를 맛있게 먹는 법

by 김준정

나는 코스에 없는 산은 올라가지 않는다. 오래 산을 다니려면 얼마간 남겨놓는 지혜가 필요하니까. 삶의 기대를 심어놓는 일이랄까?


진심을 털어놓자면 같은 일당을 받고 일을 더 하는 기분이다. 기왕이면 서둘러 일을 끝내고 퇴근 아니 하산하면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박대장은 매번 안 가도 되는 산을 올라가느라 길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길이 아닌 곳으로 내려오다가 다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의 기대도 저버리는 일없이 과외의 봉을 올라가는 그를 보면 집념이 강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지 학습능력 부재를 의심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백운산 산행은 진틀-신선대-상봉-노랑이재-포스코 연수원 코스였는데 상봉과 노랑이재 사이에 억불봉이 있었다.


“억불봉 다녀오실 분들은 들렸다 오셔도 돼요”

팀장님이 말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백운산은 1,222미터(웹 정보에 따르면)로 고산이다. 지형상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 없는지 상봉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철쭉 군락지였는데 철쭉이 고개도 못 내밀고 마른 가지만 나부끼고 있었다. 올해 이 지역에 이상기온이 있어서 개화에 방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철쭉은 말이 없고, 마침 나는 철쭉이 피기 전에 백운산에 왔을 뿐이었다. 타이밍이란 남녀 사이뿐 아니라 꽃과 사람 간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봉을 지나자 억불봉과 수련관을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한 회원이 말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억불봉 가봐야겠어요.”

나는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유: 삶의 기대를 심어놓는…) 그런데 환씨, 주사장, 유선수가 간다고 해서 나만 안 가겠다고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2주 만에 하는 산행이었다. 과외하는 학생, 가족을 빼고는 사람을 만나는 일도 2주 만이었다. 매일 집밥을 만들어 먹고 어떤 날은 옷 정리를 하면서 묵은 짐을 버리기도 했다. 비워진 붙박이장에 창고 방에 있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챙겨 넣었더니 서재가 만들어졌다. 실종된 방바닥이 드러나고 말갛게 세수한 얼굴 같은 방을 보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런 일에 충만한 기쁨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아무튼 그날만은 집에서 가득 충전을 한 기분이라 억불봉을 가기로 했다. 억불봉까지는 서너 개의 암봉을 올라가야 했는데 하나 오르면 두 번째 봉이 나타나고, 그걸 지나면 앞에 또 하나가 나타났다. 이래서 내가 안간다고 했잖아요, 억울했다, 이름이 어째서 억불봉인지 알 것 같았다. (높고 험준한 산봉우리에 굴이 있는 산이라는 뜻인 ‘업굴산’이 ‘억불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로프를 잡고 겨우 올라간 억불봉 정상석에서 엎드려 우는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가르침을 얻고 내려오는데 팀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나를 포함한 6명 빼고 다 도착했다며 빨리 내려오라고 했다. 우리 때문에 차가 이동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뛰다시피 해서 정신없이 내려갔다.


30인분의 잡채를 만들었다. 많다 싶을 양의 부추 위로 갓 삶아서 김이 펄펄 나는 당면을 쏟아붓고 당근, 양파, 목이버섯, 돼지고기를 넣었다. 목장갑에 고무장갑을 낀 금선배가 재료들을 섞었고, 주언니가 1리터 물병에 든 양념장을 부었다. 고선배가 커다란 접시 위에 푸짐하게 잡채를 담아내면 마지막으로 내가 깨를 뿌렸다.


집에서 만들기도 손이 많이 가는 잡채를 뒤풀이로 먹다니. 양파와 목이버섯은 주언니, 당면은 고선배, 양념장은 금선배, 그리고 당근, 부추, 돼지고기는 나, 이렇게 네 명이 집에서 준비를 해왔다. 그렇게 많은 양의 잡채는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색색의 고명들과 당면이 한데 아우러져 참기름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흘렀다. 잔치하면 같이 먹는 재미. 잡채를 먹는데 저절로 흥이 났다. 우리가 나누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단출하게 혼자 즐기는 초밥이 있고, 함께 먹어야 맛있는 잡채가 있듯 ‘혼자 있는 시간도, 함께하는 시간 모두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를 그득히 채웠더니 억불봉에서 울었던 일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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