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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산악인이 될 조짐

by 김준정

이제는 자연스러운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뭔가를 하지 않으면 이상해진다. 애써 걷거나 움직이지 않으면 활동량이 줄어서 근육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 없이 과자나 빵, 배달음식을 먹다 보면 금세 배가 나오고 살이 찐다. 차를 타도, 은행을 가도, 식당을 가도 에어컨이 나와서 여름에도 덥지 않은 게 당연하게 되었다.


대형 마트를 갔다. 시장도 장사가 끝난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원래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본다. 어쩌다 (일 년에 한 번) 대형 마트를 가면 오늘같이 마음이 불편해지고 말아서다. 카트에 산처럼 쌓인 물건을 보는 일도 힘들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물건의 바코드를 찍는 계산원을 보는 일도 힘들다. 시장 좌판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을 볼 때보다 마음이 심란 해지는 건 도대체 왜일까?


토요일 저녁 7시, 대형 마트는 쇼핑하는 사람들과 물건들로 넘쳐났다. 각종 시식코너와 산처럼 쌓인 물건들 때문에 어지러웠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과대포장. 4 등분한 수박이 손잡이까지 달린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 있었고, 편육은 간장 양념과 새우젓이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같이 랩핑 되어 있었다. 전에는 새우젓만 약봉지처럼 있었는데. 뭐든 조금씩 포장이 추가가 되어있었다. 구매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경쟁하다 보니 그리 된 것 같았다.


편육, 우럭, 고등어, 소라, 오징어를 샀다. 우럭은 시장보다 가격이 쌌고, 모두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스타벅스 에스프레소 앤 크림을 골라서 셀프 계산대에서 계산을 했다. 대형 마트는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저렴하고 동네 마트에 없는 물건이 많아도.


합천 가야산은 고향인 대구와 가까워서 20대에 김밥, 치킨, 맥주를 사서 많이 온 곳이다. 물론 정상은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해인사까지 올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목적은 계곡에서 맥주 마시면서 노는 일이었다. 그 시절 나는 호프집보다 산에서 먹는 맥주를 좋아했다. 장차 산악인이 될 조짐이 그때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십오 년이 넘게 지난 오늘 백운동 탐방지원센터에서 만물상, 서장재를 거쳐 칠불봉, 상왕봉을 올랐다. 그때와는 복장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내가 이렇게 힘세고 건장한 아줌마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겠지. 산아래 쪽에서 놀던 예전에 나와 산 정상을 올라가고 있는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서로 만날 일이 없는 사이기도 하다.


올라갈 때부터 꾸물꾸물하던 하늘은 산행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우의를 입으면 어차피 땀 때문에 젖을 거라 우산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정상이 가까워오자 경사도 급하고 큰 바위들이 나와서 손으로 앞을 짚으며 올라야 했다. 우산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비를 맞는 것은 이제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지만, 내 입에서는 “도대체 쉬운 산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당연한 소리라 아무도 대꾸해주지 않았다.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은 칠불봉, 오른쪽은 도착지인 백운동 탐방 지원 센터. “저는 이리(오른쪽) 갈게요.”하자 유선수가 “여기까지 왔는데 올라가야지”라고 했다. 반박할 말이 없어 꾸역꾸역 올라가니 또다시 나온 갈림길. 왼쪽은 칠불봉(0.05km)이고, 오른쪽은 상왕봉(0.2km)였다.


“저는 칠불봉만 갔다가 내려 갈게요. 상왕봉은 상황(왕) 봐서 올라가는 거예요.”

유선수가 또 “여기까지 왔는데 올라가야지”라고 했는데, 이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처음 들을 때는 ‘여기까지 온 게 뭐가요?’라는 반항심이 생기지만 막상 어느 정도 올라가면 ‘그럼 끝까지 어디 가볼까?’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생겨버리게 하는.


그래서 왼쪽 칠불봉, 오른쪽 상왕봉을 가고, 상왕봉 앞에 있는 우비정이라는 샘에 엎드려서 물 먹는 척하는 사진까지 찍었다. 비를 맞아서 시원한 건지 완주를 해서 시원한 건지 아무튼 개운한 기분이 되었다. 땀을 흘리고 자두를 먹었는데 얼마나 시고 단지, 자두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인 양 먹었다. 과일 한 조각도 산에서 먹어야 맛있고 번거롭지만 도시락을 싸야 산에서 먹는 밥이 맛있다는 걸 알게 된다.


등산의 마무리는 집에 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기. 종일 땀에 절은 몸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침대에 누워 넷플릭 스라도 볼라치면 감격의 눈물이 차오른다. 이렇게 당연한 것의 감사함을 느끼기에 등산만큼 좋은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제대로 느끼려면 이렇게 품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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